북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관련 발언
‘미, 증거 제시→북, 협조적 해명’ 유력
2002년 10월 제2차 핵 위기를 불러온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란을 북한과 미국이 어떻게 풀려고 하는지 대강의 얼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의혹을 제기한 미국 쪽이 증거를 제시하고 북한 쪽이 협조적으로 해명하는 이른바 ‘방코 델타 아시아(BDA) 계좌확인 방식’이 유력해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2월28일(현지시각) 하원 청문회 등에 나와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계속 논의를 해왔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논의하고 이 문제를 서로 만족할 수 있게 풀겠다는(resolve) 의지를 보여왔다”고 밝혀, 문제 해결 방식의 단초를 내비쳤다.
힐 차관보는 문제의 ‘완전한 해결(solve)’보다는 ‘차이의 타협적 해결(resol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면 부인하던 북한도 서면 증거를 내놓으면 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2·13 합의’ 초기조처 이행 단계에서 핵 프로그램 목록 협의와 신고의 두 단계를 설정한 것도, 아직 북-미간 의견일치가 되지 않아 논의와 타협의 여지를 상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힐 차관보의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2002년 2차 핵 위기 당시 북한의 고백을 강요하던 식의 일방적인 정보평가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타협적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북 특사를 지낸 조지프 디트라니 국가정보국(DNI) 북한담당관도 지난달 27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 나와 “농축 활동이 계속되는지는 중간 수준에서 확신하며, 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는 진전의 정도에 대해선 모르는 상황”이라며, 이전보다 발언 수위를 낮췄다.
미국 쪽이 확신하고 증거를 갖춘 정보는 1990년대 후반 파키스탄의 칸 박사로부터 넘겨받은 20여기의 실험용 가스원심분리기와 이후 2002년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150t 분량의 알루미늄관 정도로 알려져 있다. 힐 차관보가 밝힌 대로, 북한이 원심분리기를 대규모로 가동하려면 그 이상의 장비와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수준에 대한 관련 정보는 확신할 수 없는 실정이다.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등 탈북자를 통해 프로그램의 존재 사실이 알려진 이후 미 중앙정보국은 2002년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2005년부터 2기 이상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을 것이란 정보평가 보고서를 내놓았고, 2004년 4월에는 6기까지 가능하다는 정보평가를 내렸다. 존 볼턴을 비롯한 네오콘 등은 대북 강경정책의 빌미로 이를 십분 활용했다.
6자 회담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제시하는 정보까지도 부정한다면 북쪽은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을 받을 것이고, 미국의 정보 이상을 성실하게 신고한다면 신뢰를 쌓을 수 있을 것”이라며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협의-신고가 이뤄질 60일간의 초기 이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신고목록 포함 여부는 6자 회담의 수석대표들이 직접 참석하게 될 한반도비핵화 워킹그룹 회의에서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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