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 문정인 동북아위원장 '북핵 긴급좌담'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한·중·일 순방을 계기로 북핵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북핵 문제의 점검과 전망을 위해 20일 오전 서울시내 호텔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과 긴급 좌담을 마련했다.
라이스 ‘주권국가’ 발언효과 미-중 협의 달려
북 특유 ‘명분정치’ 이해하고 체면 살려줘야
북, 국제정세 유동성 이해·단계적 접근 필요
사회 = 라이스 장관의 방문을 계기로 북-미의 타협 가능성을 비롯해 북핵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부터 듣고 싶다.
정세현 = 미국이 말로는 6자 회담을 통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핵 문제를 대화방식으로 풀려는 것인지, 정권 교체와 체제 문제까지 손을 보려는 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한국은 분명히 핵문제를 대화를 통해 풀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고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중국도 비슷한 태도인데, 미국은 말로는 대화를 하자면서 회담장 밖에서 하는 이야기는 정권 교체까지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게 문제다. 목표가 분명치 않는 상태에서 중국의 지렛대, 안보리 회부 같은 논의는 해결은 커녕 문제만 복잡하게 만든다.
문정인 = 북한은 올들어 라이스 장관 인준 청문회와 부시 대통령 취임식, 부시 대통령의 국정 연설을 기다렸다. 라이스 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이 있긴 했지만,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는 북한에 대해 완화된 형태의 언급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연설만을 보면 북한으로선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텐데, 그날(2월2일)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에서 마이클 그린 미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한-중-일에 ‘북한이 리비아에 핵물질인 6불화우라늄을 수출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고 보도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2월10일 북한 외무성 성명을 촉발시킨 한 요인이 됐다고 본다. 고립·봉쇄의 체제전환인가, 협상을 통한 해결인가가 분명치 않다. 북은 미국이 북핵문제와 관련해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9달' 되찾을 계기
사회 = 지난 16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라이스 장관이 ‘폭정의 전초기지’발언을 철회하지 않으면 6자 회담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는데, 미국의 ‘5 대 1 포위 구도’ 구축에 북한이 명분을 준 측면이 있다. 그 전까지는 협상 의지 결여로 미국이 고립됐는데 역전된 것 아닌가?
정 = 중간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 거친 말이 오갔고 북한이 결과적으로 회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대목만 부각됐는데, 6자 회담은 항복문서 조인식도 아니고 무슨 재판도 아니다. 6자 회담은 동등한 자격으로 6분의 1 자격으로 참여해 문제를 푸는 것이다. 대화는 거래이고 흥정인데 미국이 회담의 결과로 나올 수 있는 것을 먼저 약속하고 나오라고 하니, 북한은 ‘이런 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회담에 나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라이스 장관이 ‘북한은 주권 국가’라고 했는데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의 ‘대체재’인지 북한으로서는 한번 검토를 해봐야 할 것이다. 북한은 체면을 중시한다. 미국은 군사적 공격은 없다고 말하는 데 말로 상대방을 자극하는 게 문제다. 회담을 하기로 했으면 언어폭력은 삼가야 한다.
문 = 1·2차 6자 회담까지만해도 미국은 구체적인 제안을 낸 적이 없다. 지난해 6월 3차 6자 회담에서 미국이 구체적인 안을 내는 데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노력을 많이 했다. 이에 대해 북한의 ‘좋다’ ‘나쁘다’는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반응도 없이 북한이 다시 원칙으로 들어가 ‘분위기 조성’ 등을 요구하고 있다. 3차 6자 회담에서 미국의 제안이 북한 처지에서 미흡한게 있으면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고, 이런 조건 하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으로 6자 회담을 살려야 한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온 왕자루이 중국 대외연락부장이 밝혔듯이 미국 쪽은 성실성을 보여야 한다.
정 = 북한의 협상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북한은 점진적 양보를 하지 않고 중간 과정에서는 버티기로 하다 막판에 타결하는데, 협상 문화의 차이가 있다. 북한도 단계적으로 접근하면 미국과 대화가 될 것이다. 미국도 말로서 공격하는 것이 회담 분위기를 깨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북한을 상대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실제 북한과 협상에서는 제안보다도 분위기가 중요하다. 지난해 6월 3차 6자 회담이 끝난 직후 북한은 만족했고 미국도 괜찮다고 해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겠구나는 희망을 가졌다. 그 이후 9개월은 잃어버린 시간이 됐지만, 이번 라이스 장관의 방문으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미국이 중국을 통해 좀더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중국이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박봉주 북한 총리가 22일부터 5박6일동안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이 박봉주 총리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9개월 전으로 돌아가면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긴장 장기화' 우발충돌 부를 수도
사회 = 라이스 장관 발언이라든가 이번 방문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인가?
문 = 북한이 미국에 원하는 게 세 가지다. 첫째, 대북 적대 정책 포기, 둘째, 주권에 대한 상호 존중, 셋째, 상호 내정 불간섭이다. 라이스 장관은 첫째와 둘째를 이야기했다. 과거보다 수사학적으로 보면 순화된 것이다. 또 한가지 6자 회담 틀에서 접촉에 대한 신축적인 자세다.
정 = 지난 9개월동안 험악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라이스 장관의 방문을 기점으로 9개월 전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사회 = 라이스 장관의 이번 발언은 다른 미국 관리들이 다 이야기했던 것들 아닌가. 북한이 라이스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으로 보는가?
정 = 라이스 장관이 중국에게 ‘북한이 주권국가란 이런 뜻이다’라고 부연 설명하고 이를 중국이 북한 쪽에 전달한다면 북한으로서는 체면이 서는 일이다. 라이스의 공개발언 보다 미-중의 협의가 더 중요하다. 북한의 반응이 바로 나오지는 않겠지만.
문 = 물론 미국과 일본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다는 데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문제는 심각하게 꼬일 것이다. 북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고, 북한은 유엔 안보리 회부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되기 힘들다. 북한도 국제정세의 유동성을 냉철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3차 6자 회담 1년이 되는 6월을 전후해 벌써 ‘6월 위기설’ 마저 나오고 있다.
정 = 6월 위기설이 나온다니 한 마디 해야겠다.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고 일본이 과연 동아시아 국가인지 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이 내부 우경화 추세에 편승해 자기들의 오랜 소원을 달성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이런 식이면 일본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못된다. 얼마전 일본에 갔는데 일본이 안보리 이사국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과거사 해결이다. 둘째는 핵문제에서 일본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일본말로는 ‘추수’라고 한다는데 미국 ‘추수(추종) 외교’를 그만 해야 한다.
문 = 최근 일본은 한국, 북한, 러시아,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 전부와 사이가 나쁘다. 일본 우파들 사이엔 올해 자민당 창건 50주년 등을 맞아 평화헌법 개정이 거론되고 있다. 반미주의자였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요즘은 중국위협을 내세워 친미주의로 돌변했는데 이를 빗대 ‘기생 민족주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 = 일본이 핵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면 이는 또다른 ‘과거사’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미국은 학급에서 반장 역할이면 족한데 교감·교장·선생(문 위원장은 교육감이라고 말함) 행세를 하려고 해서 문제인데 일본이 그 뒤에서 고함을 더 지르고 있다.
사회 = 일본의 악역을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데, 그럴수록 일본의 역할이 중요한 것 아닌가?
문 = 일본에게 납치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게 북핵 문제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북-일 관계 개선과 납치자 문제 등 현안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일본이 납치 문제에 연연해 대북 강수를 두면 일본의 역할이 제약된다. 고이즈미 총리와 부시 대통령이 가깝고, 고이즈미 총리가 김정일 위원장을 두 번 만났다. 리비아 문제 해결 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구실을 고이즈미 총리가 할 수 있는데 일본이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너 미국에 밀착하면 지역과 국제사회에 공헌할 기회를 잃게 된다.
정 = 일본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중국보다 일본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 싶으면. 북핵 문제 과정에서 제대로 해줘야 한다.
문 =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이 시간을 끌면서 북한 고립, 체제 전환 내지 고사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한다면 중국이 이에 동의할 수는 없다. 미국의 군사행동 대북제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협상도 안되고 군사행동도 못하는 교착상태가 계속되는 ‘긴장의 장기화’가 우려되는데 이 경우 우발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정리/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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