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시범운행하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한을 방문할 박용길 장로가 15일 오전 서울 수유리 자택 ‘통일의 집’ 마당에서 밝게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경의선 열차 오르는 박용길 장로
문익환 목사 살아있었다면 덩실덩실 춤췄을텐데
문익환 목사 살아있었다면 덩실덩실 춤췄을텐데
“문익환 목사 살아있었다면 덩실덩실 춤췄을텐데”
56년 만에 남북의 경계를 가로질러 달릴 경의선 열차에 오를 생각에, 박용길(89) 장로는 설레는 ‘아흔살 소녀’가 돼 있었다.
서울 수유동 ‘통일의 집’ 문패를 내건 자택에서 15일 만난 그는 하얀 레이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95년 방북하고 휴전선을 걸어서 넘어올 때 입었던 옷이야. 북한에서 선물로 받은 이 옷을 입고 판문점에서 ‘만세’ 부르고는 바로 구치소로 끌려갔지. 17일 경의선 기차에 탈 때 입을 거야.”
박 장로(통일맞이 명예이사장, 민화협 상임고문)는 남편 고 문익환 목사의 아내이자 동지로 남북 화해와 통일을 위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 생애를 던졌다. 북한을 ‘합법적’ 혹은 ‘불법적’으로 방문한 것도 여러 번이다. ‘남북 열차’로 가는 이번 방북길은 그에게도 더욱 각별하다.
“문 목사가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1989)에서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떼쓰겠다고 했잖아. 문 목사 떠난 지 벌써 13년인데 이제서야 됐잖아. 문 목사가 살아 있다면 이 열차에 타 덩실덩실 춤추고 그렇게 잘 부르던 노래도 한 곡조 뽑겠지.”
그는 “열차가 남북의 경계를 넘어 달리면 우리 혈맥이 통했다는 느낌이 들 거야”라며 기대에 부풀었다. “95년 난생처음으로 겁없이 ‘밀입북’했을 때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갔는데, 제 나라 가는데 왜 남의 나라에서만 갈 수 있는지 화가 나고 속상했어. 그래서 나는 돌아갈 때는 꼭 ‘삼팔선 넘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한달을 버텼지.”
경의선 기찻길을 따라, 박 장로의 기억은 열차 타고 서울에서 평양으로, 만주로 자유롭게 다녔던 ‘어린 시절’로 달려간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부모님이 계시던 평양을 오가던 이야기, 경기여고 시절 매일 개성에서 기차로 통학했던 단짝 친구, 1946년 만주에 있던 동포들을 열차에 태워 남쪽으로 피난시키던 일들을 회상했다. “학창 시절 서울에서 집에 갈 때면 평양 기차역에서 내려서 차를 타고 한나절을 덜컹거리며 갔지. 까르륵 웃고 까불고 정말 즐거웠어.”
열차가 이어지면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평양 대유동에 있는 어머니 묘소도 가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들을 맘껏 다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자연스레 남북을 이어주던 열차가 왜 지금 끊겨 있나. 남편은 너무 더딘 현실에 마음이 급해서 ‘밀입북’하고 통일운동 하다가 결국 11년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지.”
그는 2005년 6·15 행사를 마치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10년 만에 만났던 이야기를 하며 “김 위원장을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연장자로서 이런저런 할 얘기도 팍팍 해야겠는데 만나지지가 않아. 우선은 빨리 통일하자고 해야겠어. 김 위원장도 약속을 했으면 빨리 답방을 해야지”라고 말했다.
글 박민희, 사진 이정아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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