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지원 유보 등 ‘자충수’ 우려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의 병행·발전’이라는 공식 정책노선에서 벗어나 사실상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연계론’으로 기우는 경향이 뚜렷하다.
정부가 지난 22일 북한이 ‘2·13 합의’ 초기조처를 이행할 때까지 쌀 차관 제공을 유보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게 대표적이다. 이는 ‘철학의 빈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으로나 정책적 효과의 측면에서 문제가 적지 않다.
우선 ‘2·13 합의’ 이행 지연의 책임을 온전히 북한 쪽에만 돌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미국은 ‘2·13 합의’ 30일 안에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약속했고, 북한은 이 문제가 해결되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의 북한 방문을 초청하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아직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책임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비디에이 문제 해결의 책임이 기본적으로 미국 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지침을 내리기 이틀 전인 지난 20일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열린 관계 부처 장관급회의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식량 차관 제공 유보’를 주장한 반면,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유보하면 남북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이 우려된다’며 ‘2·13’ 이행과 쌀 차관의 연계를 반대했다. 17일 남북열차시험운행이라는 역사적 행사를 치른 직후였다.
당연히 정부 방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당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5일 “북한은 ‘2·13 합의’를 지키겠다고 하고 있는데 우리가 쌀을 안 주면 북한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정부의 방침은 실효성 측면에서도 북한의 ‘2·13 합의’ 조기 이행을 견인할 가능성이 낮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직후에도 대북 식량 차관 제공을 유보했지만, 그해 10월 핵실험 강행을 막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는 27일 “지난해엔 식량 및 비료 지원 유보를 방파제 삼아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지켰다는 자위라도 할 수 있지만, 이번엔 게도 구럭도 다 놓칠 상황으로 몰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정부의 이번 방침은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긴밀한 한-미 공조를 명분으로 한 미국 쪽의 ‘압력성 요청’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24일(현지시각) 정례브리핑 때 ‘북한에 쌀을 보내지 말라고 한국에 요청했냐’는 질문에 “쌀 차관 제공과 2·13합의 이행은 별개 문제”라며, 미국 정부의 그간 행보 및 속내와 전혀 다른 원칙론을 밝혔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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