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피에스아이)의 늪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21일 남북 개성 접촉이 이뤄진 뒤 정부가 더욱 좁아진 선택의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피에스아이 참여가 가져올 손익과 파급효과에 대한 면밀한 전략적 검토 없이 섣불리 참여 방침과 시기를 확정적으로 얘기해 온 탓이다.
우선 정부가 21일 남북 접촉 이후 남북관계를 고려해 피에스아이 전면 참여 방침을 철회하거나 무기한 유보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에 끌려다닌다’는 보수층의 반발과 함께, 4·29 재·보궐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고정 지지층 이탈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작용할 수 있다. ‘의연하고 단호한 대응’이라는, 이명박 정부가 그간 밝혀온 대북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피에스아이 참여를 전격 발표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더 크다. 자칫하면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관계가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북쪽이 남쪽의 피에스아이 참여를 문제 삼아 개성공단 사업과 관련해 강도 높은 조처들을 취하겠다고 통보하거나 최악의 경우 ‘우발적 군사충돌’을 불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19일 “개성공단 폐쇄까지 감수하며 굳이 피에스아이에 들어갈 필요가 있냐는 비판적 여론이 국민들 사이에 높아질 수 있고 이는 정부에 매우 아픈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인지 정부 당국자들도 피에스아이 참여 방침 발표를 21일 이후로 미룬 뒤에는 무척 신중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참여한다는 원칙은 정해져 있다”면서도 “발표 시점은 빨라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밝혔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들도 “발표 시점은 위(청와대)에 물어보라”며 입을 닫았다.
이런 딜레마는 정부가 자초한 ‘예고된 재앙’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정부는 피에스아이 참여 문제를 처음에는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한 제재 차원에서 언급했다가 남북간 무력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북한을 겨냥한 게 아니어서 남북관계에 끼칠 악영향은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19일에도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내어 “피에스아이는 남북관계와 별개의 조처로 북한에 대한 대결·선전 포고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피에스아이 발표 시점을 남북 접촉을 이유로 21일 이후로 다시 미룸으로써 이 문제가 남북관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자인한 꼴이 됐다. 외교안보 분야 전직 핵심 관계자는 “북한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을 품고 남북관계를 중단하고 싶어하는데, 여기에 땔감을 대주는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며 “우리한테 유리한 의제가 있고 불리한 의제가 있는데, 정부가 왜 굳이 피에스아이라는 불리한 의제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이참에 정책 혼선과 전략 부재와 관련한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파장이 큰 문제라면 사전에 정확하게 폭넓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대응 방안을 내놓아야 했다”며 “피에스아이 참여 논의를 주도한 외교부의 수장이자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용인 기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