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행적 논란을 빚고 있는 백선엽 백야전전투사령관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30일 전북 남원시의 정보(G-2)상황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6·25 61주년 앞두고‘반공 영웅화’ 논란 증폭
작전참모 지낸 고 공국진 전 준장 ‘한국전쟁사’서 증언
“아이들·부녀자들 포로수용소 갔다가 반수 이상 죽어”
“송요찬도 토끼몰이 토벌 반대”…백장군쪽 “답변 곤란”
작전참모 지낸 고 공국진 전 준장 ‘한국전쟁사’서 증언
“아이들·부녀자들 포로수용소 갔다가 반수 이상 죽어”
“송요찬도 토끼몰이 토벌 반대”…백장군쪽 “답변 곤란”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한국전쟁의 영웅인가? 독립군을 토벌하던 친일부역 군인인가?
6·25 발발 61돌을 앞두고 백선엽(92) 장군을 둘러싼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군 첫 4성 장군이자 참모총장을 두 번 역임한 군 원로인 백 장군을 두고 <한국방송>(KBS)이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일부에선 동상 건립에 나서지만, 이에 대해선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일방적 미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한겨레>는 백 장군이 주도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이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불러왔다는 당시 군 관계자의 증언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군사편찬위원회)가 1960년대 참전자들의 구술 증언을 채록한 자료인데, 여기서 백 장군의 작전참모 출신인 예비역 장성은 당시 작전과 관련해 회한 서린 이야기를 털어놨다.
■ “이 양반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며” 1964년 발족한 전사편찬위는 <한국전쟁사> 편찬을 위해 참전자 3000여명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 채록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의 일환으로 1965년 6월15일 한국지업㈜ 사장이었던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을 상대로 증언 청취가 이뤄졌다.
“(1군단) 작전참모로 갔습니다. 백(선엽) 장군 모시고 춘계, 1차, 2차, 3차, 4차 공세까지 겪고, 지리산으로 갔다가…. 백 대장하고 싸우고 헤어졌습니다.” 전장에서 지휘관과 작전참모는 가장 긴밀한 사이인데, 왜 헤어졌다는 것일까?
“지리산이 4개 도, 9개 군입니다. 9개 군 주민이 20만입니다. 이 양반(백 장군)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서 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로 오는데, 트럭에 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국내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느냐 했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싸운 것입니다.”
한국전쟁중이던 1951년 말 미군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사령부를 꾸리고 백선엽 당시 1군단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백장군의 이름을 따 ‘백(白)야전전투사령부’로 불린 부대다. 예하에는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과 8사단(사단장 최영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등이 배치됐다. 백 장군과 의견 대립 끝에 백야사 작전참모를 그만뒀다는 공 전 장군의 증언이 이어졌다.
■ “사고 많았다…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 “헤어져 가지고 (나는) 21연대로 갔어요. 결과가 무엇입니까? 엄동설한에 우리는 바-카 입고 히-타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민은 광주(포로수용소)에 갔다가 반수 이상 죽었어요. 백 장군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성과가 늦더라도 그렇게 해야지, 이 추운 때에 광주에 갖다 놓으면 그 양반들이 두고두고 한평생 원망할 것입니다. 그 후에 내 진의를 알았어요.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당시 백 장군이 채택한 작전 이름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 지리산을 포위해 토끼몰이를 하는 식으로 주민을 소개하고 먹을 것을 없애 고사시키는 방식이었다. 작전 성과는 좋았다. 51년 11월 시작된 토벌작전은 이듬해 초 사실상 완료됐다. 포로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수용된 광주포로수용소는 열악한 환경과 양민 수용으로 사회문제가 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3년 해체됐다.
이어지는 공 전 장군의 증언. “나도 참모로서 잘못이 있지. 참모로서 최선을 다해서 건의하면 되고, 실패를 최소한으로 국한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인데, 그 작전의 작전참모로서 못하겠다,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중략) 송요찬도 반대했습니다. 최영희도 다 반대했습니다.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텐데….”
■ “일방적 비난 부당하지만, 본인 침묵도 문제” 공 전 장군의 이런 증언과 관련해 백 장군의 견해를 듣고자 했으나, 백 장군을 수행하는 관계자는 “장군님이 연로해서 그런 인터뷰가 어렵다. 답변이 곤란하다”고 답했다.
증언록의 성격상 한쪽의 주장인 만큼 모든 증언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백 장군이 책임자로서 실행했던 작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백 장군은 과거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휘부의 지침과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중략) 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토벌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도 혹시라도 부하 장병의 비행으로 희생된 넋들이 있다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다.”(<실록 지리산>)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한 역사학자는 “양민학살 문제는 전쟁이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함께 봐야 하고, 백 장군보다 더 심하게 한 지휘관도 있어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본인으로서는 (양민학살 문제나) 간도특설대 등 자신의 과거와 관련해 민감한 문제에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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