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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 국립현충원에 안장

등록 2011-11-30 15:53

1950년 9·28 서울수복에 이어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재흥 장군(앉은 이)이 육군 2군단장 시절 참모들과 찍은 사진. 그는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일본 육사 출신인 탓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9·28 서울수복에 이어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재흥 장군(앉은 이)이 육군 2군단장 시절 참모들과 찍은 사진. 그는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일본 육사 출신인 탓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현리 전투’ 때 경비행기 이용해 도주…병력 60% 잃고 군단 해체
치욕적 패전 불구 국방부는 ‘전쟁영웅’ 묘사…‘친일행적’ 도 논란
“전시에는 군인으로, 평시에는 외교 및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여 국가에 헌신한 유재흥 장군은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무공훈장 5회, 수교훈장 2회 등 수많은 훈포장을 국내외로부터 수여받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지휘관이자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관 기록(2004년 기준)은 지난 27일 91살을 일기로 숨진 유재흥 예비역 육군중장에 대해 ‘전쟁영웅’이라고 묘사했다.

 군은 이런 평가에 따라 유 장군의 장례식을 합동참모본부장(위원장 정승조 합참의장)으로 치른 데 이어 2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 기록은 일본육사 출신(25기)으로 학병을 권유해 친일사전에 등재된 사실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전쟁에서 최악의 패전으로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빼앗기는 빌미가 됐던 현리전투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공적만을 열거했다.

 

■ 한국전쟁 최악의 패전주인공…적전 도주

  1950년 10월16일 평양으로 북진 중 창설된 3군단의 지휘봉을 잡은 유 장군은 이듬해 5월 16~22일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에 벌어진 현리전투로 병력 60%를 잃은 채 창설 8개월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더구나 유 장군은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며 작전 중 경비행기를 이용해 작전지역에서 도주하고 사단장 등 최석 9사단장 등 군지휘관들도 허둥지둥 탈주하는 군기문란을 저질러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나>에서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전쟁전투사는 현리전투에 대해 “중공군 2개군에 의해 국군 3군단 예하 3, 9사단(3군 산하)이 담당하던 오미재 방어선이 돌파당해 퇴로가 끊겨 3군단 전원이 철수하는 악전고투를 치르면서 70㎞나 후퇴한 전투”라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전투에 참가한 노병과 학도병들은 현리전투에 대해 “패전이 아니라 처참한 패주”라고 기억하고 있다.

 현리전투 생존자인 정병석(76)씨는 지난해 8월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지휘부가 연락기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면서 “전황이 급박하다보니 박격포 등 중화기는 방태산 바위 밑에 숨긴 채 몸만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3사단 23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상등병으로 이 전투에 참가한 박한진(83)씨도 “지휘부가 먼저 도주하자 지휘체계를 잃은 병력은 중대, 소대 단위에서 10명 규모로 뿔뿔히 흩어졌고 소총을 버린 병사도 부지기수였다”면서 “일부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을 떼고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악전 고투속에 낙오된 국군 상당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희생됐거나 포로로 잡혀 북한군으로 전선에 재투입돼 아군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과 탈진으로 죽어간 전우도 태반이었다”고 참혹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다 포로로 잡혀 북한에 끌려갔다가 갖은 고생을 하다 1994년 탈북했던 귀환 국군포로 1호인 조창호 소위는 유재흥 장군과 면담을 추진했으나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나흘간 70㎞를 도망친 3군단 병력은 5월19일 오후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평창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됐다. 집결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 중공군 1개 중대에 퇴로 뚫려…귀환 1호 조창호 끝내 면담거부

유재흥 예비역 육군중장
유재흥 예비역 육군중장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 치욕의 현리전투는 1951년 5월16일 오후 4시에 시작됐다. 당시 오미재 방어선은 인제군 기리면과 상남면 31번 국도에 있는 완만한 고갯길로 인제 현리, 홍천, 정선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3군단 유일의 후방 보급로 및 주요 거점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 오미재에 대한 아군의 방책은 허술했고 공세 하루만인 5월17일 중공군 1개 중대에 의해 오미재는 탈취됐다. 그러나 이는 국군 3군단 해체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오미재를 빼앗긴 3군단은 퇴로를 열고자 예하 3, 9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투입해 재탈환에 나섰지만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했다. 퇴로가 끊겼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3군단 병력은 5월17일 오후 날이 어두워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436m의 험준한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유재흥 장군은 현리 전투 참패와 작전중 도주행위에 대해 1994년 나온 자서전 <유재흥 회고록-격동의 세월>(을유문화사)에서 자성의 태도를 일부 보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 태도를 보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주보급상의 요충지인 오미재 고개가 미 제10군단 지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전 병력 배치를 거부 당했을 때, 차선의 예비책인 우리 군단내에서 오미재 고개에 가장 가까운 곳에 부대를 배치해놓은 방안을 강구하지 못한 것이 작전실패의 원인”이라며 “미 제10군단과 철수(후퇴) 방향에 대한 협조 부족으로 양 군단 사이에 넓은 간격이 발생하여 적 진격을 용이하게 한 것을 자성한다”고 언급했다. 특히 “솔직히 말해 그때만 해도 겨우 하룻밤 사이에 군 전선을 뚫고 30㎞(도상거리)나 되는 원거리를 주파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며, 적의 유격전술을 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다”며 중공군의 전력 대비에 소홀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작전중 도주한 것에 대해서는 “후일 나는 현리에 남아 직접 양 사단을 지휘했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고 자성해보기도 했다”면서도 “그러나 대대 내지는 연대 공격 목표에 불과한 오마치(오미재) 고개 하나를 놓고 사단장, 군단장 등 별 셋이 달라붙어 지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고 변명을 했다.

 그는 이어 “더욱이 1개 대대의 예비대도 수중에 없는 군단장인 나로서는 도리어 (작전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최 사단장(최석 9사단장)의 장담을 믿고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라며 사단장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 사단장에 대해 “부임 전 실전보다 행정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행정병과에서 하루아침에 실전 지휘관이 되면 사태 처리에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라고 깎아내렸다.

 3군단의 전력손실 규모에 대해 중국 쪽이 ‘2만3천명 섬멸’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는 “총병력 2만2천명 가운데 4천명의 사상 및 행방불명을 냈으며, 행방불명자의 대부분인 약 3천명은 후에 부대에 복귀했다”고 기술했다.

 

■ “당신의 군단은 어디있소” “모르겠다”

 현리전투에서 참패한 3군단은 미 제8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그해 5월26일 전격 해체됐다. 또 1군단 지휘권도 미 8군이 직접 통제하는 등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겨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3군단 해체 과정에서 벤 플리트과 유재흥 장군과의 대화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어 지금도 군안팎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밴 플리트는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있소?”하자 유재흥 장군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밴 플리트는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라고 힐문하자 “그런 것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밴 플리트는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라고 말했다.

 

■ 전작권 빼앗긴 주인공, 승승장구에 작전권 환수 반대 선봉 

유 장군으로서는 이전에 자신이 맡고 있던 2군단 전멸에 이어 두번째 군단 해체라는 치욕을 겪었으나 아무런 징계나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2군단장 시절 유 장군은 1950년 11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거듭하던 중 중공군에 포위공격당해 괴멸상태를 당해 후퇴한 끝에 군단 해체라는 치욕을 맛본 바 있다.

 1957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낸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 정군대상으로 지목돼 육군중장으로 예편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 성공 귀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등용돼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뒤에도 정부 산하 기관의 요직을 지냈다. 1974년 대한석유공사 사장, 1978년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1991년 성우회 회장을 지냈으며 노무현 정부 때는 작전권 반환 반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유재흥 장군의 일본육사 3년 후배(57기)인 박정희 대통령은 현리전투 참패와 도주행위에 대해 당시 사단장의 무능함을 지적하면서 “전투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서 별다른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식으로 유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기록했다.

 친일파 장교에서 해방 뒤 한국군 장교로 변신해 미군에게 작전권을 빼앗기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군에 있을 때나 군문 밖에서나 영전을 거듭하는 현실은 대한민국의 왜곡된 현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도형 선임기자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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