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2000년 8월 평양 모란관에서 최학래 당시 한겨레신문사 사장(오른쪽)과 박권상 <한국방송> 사장(왼쪽)의 손을 잡은 채 남쪽 언론사 대표들과 함께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최학래 한겨레신문사 고문
“어깨 치고 껄껄대도 호탕
철권통치? 만나보면 달라” “머리카락이 좀 빠지셨나요…” “예, 머리는 좀 벗겨졌지만 하체는 더 튼튼해졌습니다.” 2006년 6월, 그와의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된 ‘상봉’에서 나눈 수인사였다. “몇년 사이 북은 더욱 팍팍해졌고, 남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넉넉해졌다. 앞으론 어떻게 할 거냐”라는 말을 나는 이렇게 넌지시 던져봤다. 그의 빠른 머리회전으로 봐서 이 말 뜻을 못 알아챘을 리 없을 법한데, 그는 짐짓 딴청을 피웠다. “나 술 끊었습니다. 의사들이 성화를 해서.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나이 많으신데 오래 사셔야지요.” 그때만해도 그는 아주 건강했고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선군정치’를 내세우면서 ‘강성대국’을 준비하던 그는 대미 대결의 불가피성을 괴로운 현실로 받아들이며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에 이어 중국마저 자본주의 판에 끼어드는 절체절명의 국제정세 아래, 부시 미국 정부의 ‘압살정책’을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그래서 그 때 그는 “건강하게 살아남는 문제”를 자신에게 확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하루 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미국이 어떤 형태의 무력이든 무력으로 자국을 침탈한다면 이를 되갚을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바로 다음날 “장거리 미사일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대북 운신이 거북한 듯 하다”며 나는 미사일과 핵무기 문제를 슬쩍 짚어봤다. 김정일 위원장도 “평양 사람들은 급하면 골받이(박치기)를 한다”며 (핵무기로?) 결사항전할 것을 분명히 했다. 2000년 8월, 한국신문협회장인 나를 비롯해 언론사 사장단 50명이 평양을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세 시간 가까운 김 위원장과의 송별 오찬을 마치고 아시아나 전세기가 순안비행장을 이륙했다. 이종대 국민일보 사장이 내 곁으로 왔다. “우리 오늘 못 내려가는 줄 알았어.” “왜?” “회장이 위원장 어깨를 툭툭 치고 껄껄거리는데, 북한 경호원한테 총 안 맞은 게 다행이야.” 옆에 있던 다른 신문사 사장들도 거들었다. “남쪽에서도 대통령 어깨를 툭툭 치면 살아남겠어?”
그랬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호방했다. 자신의 측근들에게 “이 분들 잘 모시라구. 남한에선 언론이 대통령보다 더 무서운 거야”라면서도 남쪽 언론사 사장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전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그는 참 알기 어려운 인물이다. 북의 체제를 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철권통치자여야 맞는데, 막상 만나보면 영판 다르다. 그를 두고 온갖 평가들을 다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손톱만한 근거들은 있다고 해도, 글쎄 나는 그를 잘 모르겠다. 자신의 생사를 걸고, 국가의 존망을 걸고 수십년을 버텨온 백전노장의 어느 면을 그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 자신이야 말로 ‘고난의 행군’을 어렵고 어렵게, 끈질기고 끈질기게 이어온 인물이라는 사실. 이제 네차례에 걸친 그와의 대화가 기록된 취재수첩을 불에 태운다. 그의 영령이 떠난 하늘에 날린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 “미군철수는 국내 정치용
강퍅함 뒤엔 여유 묻어나”
“제가 내일 아침 또 회담을 하러 백화원초대소로 오겠습니다. 우리 간부들이 (초대소로 오는 걸) 반대하지만, (오는 길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으면 제가 새총으로 쏘아버리고 오겠습니다.”
2000년 6월13일 남북정상회담 첫날,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북한 간부들의 불편한 심사를 ‘빨간불’에, 자신의 대화 의지를 투박한 ‘새총’에 빗댄 그의 거침없는 말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 8월 남쪽 언론사 대표들이 방북한 자리에서 내가 “이회창 야당 총재를 초청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심각한 얼굴로 “이 총재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장면도 떠오른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께서 오셨을 때 내가 30만명을 동원했어요. 하지만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도 20만~30만명이라고 합니다. 동원을 했건 자발적으로 왔건 환영하면 좋은 일이지, (이회창 총재가) 어떻게 그걸 ‘파쇼’라고 주장합니까?”라고 따졌다. 그래도 김 위원장은 “같은 민족, 같은 형제”를 거듭 강조하는 우리에게 결국 “이 총재가 원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초청하겠습니다”라고 흔쾌히 약속했다.
내가 만난 김정일 위원장은 이렇듯 자신감 넘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곧바로 판단을 내놓는 매우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면 아는 게 굉장히 많고, 국제사회의 동정이나 한국 사회의 이슈에 대해서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옷은 국방색 인민복 차림이었지만, 손짓을 써가며 말하는 그의 제스처도 상당히 세련됐다. 두뇌 회전이 빨라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었다. 김 위원장은 나한테도, 김대중 대통령한테도 “주한미군이 통일 뒤에도 한반도에 주둔해야 동북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럼 왜 그토록 주한미군 철수를 부르짖냐”고 반문했더니, 그는 “그건 국내정치용입니다”라며 능청스레 웃어넘길 만큼 여유가 있었다.
김 위원장에 대한 나의 이런 평가 때문에 나는 국내 보수세력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뿐 아니라 그 후로 김 위원장을 만나고 온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 페르손 스웨덴 총리도 모두 비슷한 평가를 내놓았다. 그 뒤로 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았구나’ 하며 안도할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가수 이미자씨의 방북 공연이 성사되면 박 장관 부부도 함께 오세요. 공연을 본 뒤 우리집에 가서 식사를 합시다”라고 약속했다. 베일에 싸인 북한 지도자의 사생활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자씨의 방북 공연이 거의 성사된 단계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북을 할 수 없었고, 이젠 영영 그를 만날 수 없게 됐다. 8개월 전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그의 건강을 확인할 때만 해도 ‘건강이 좋아졌다’는 답변을 들었는데, 갑작스런 그의 사망 소식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의 생전에 북한 핵문제와 한반도 평화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나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소식이기도 하다. 고인에 대해 조의를 표한다.
철권통치? 만나보면 달라” “머리카락이 좀 빠지셨나요…” “예, 머리는 좀 벗겨졌지만 하체는 더 튼튼해졌습니다.” 2006년 6월, 그와의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된 ‘상봉’에서 나눈 수인사였다. “몇년 사이 북은 더욱 팍팍해졌고, 남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넉넉해졌다. 앞으론 어떻게 할 거냐”라는 말을 나는 이렇게 넌지시 던져봤다. 그의 빠른 머리회전으로 봐서 이 말 뜻을 못 알아챘을 리 없을 법한데, 그는 짐짓 딴청을 피웠다. “나 술 끊었습니다. 의사들이 성화를 해서.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나이 많으신데 오래 사셔야지요.” 그때만해도 그는 아주 건강했고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선군정치’를 내세우면서 ‘강성대국’을 준비하던 그는 대미 대결의 불가피성을 괴로운 현실로 받아들이며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에 이어 중국마저 자본주의 판에 끼어드는 절체절명의 국제정세 아래, 부시 미국 정부의 ‘압살정책’을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그래서 그 때 그는 “건강하게 살아남는 문제”를 자신에게 확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하루 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미국이 어떤 형태의 무력이든 무력으로 자국을 침탈한다면 이를 되갚을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바로 다음날 “장거리 미사일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대북 운신이 거북한 듯 하다”며 나는 미사일과 핵무기 문제를 슬쩍 짚어봤다. 김정일 위원장도 “평양 사람들은 급하면 골받이(박치기)를 한다”며 (핵무기로?) 결사항전할 것을 분명히 했다. 2000년 8월, 한국신문협회장인 나를 비롯해 언론사 사장단 50명이 평양을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세 시간 가까운 김 위원장과의 송별 오찬을 마치고 아시아나 전세기가 순안비행장을 이륙했다. 이종대 국민일보 사장이 내 곁으로 왔다. “우리 오늘 못 내려가는 줄 알았어.” “왜?” “회장이 위원장 어깨를 툭툭 치고 껄껄거리는데, 북한 경호원한테 총 안 맞은 게 다행이야.” 옆에 있던 다른 신문사 사장들도 거들었다. “남쪽에서도 대통령 어깨를 툭툭 치면 살아남겠어?”
그랬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호방했다. 자신의 측근들에게 “이 분들 잘 모시라구. 남한에선 언론이 대통령보다 더 무서운 거야”라면서도 남쪽 언론사 사장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전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그는 참 알기 어려운 인물이다. 북의 체제를 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철권통치자여야 맞는데, 막상 만나보면 영판 다르다. 그를 두고 온갖 평가들을 다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손톱만한 근거들은 있다고 해도, 글쎄 나는 그를 잘 모르겠다. 자신의 생사를 걸고, 국가의 존망을 걸고 수십년을 버텨온 백전노장의 어느 면을 그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 자신이야 말로 ‘고난의 행군’을 어렵고 어렵게, 끈질기고 끈질기게 이어온 인물이라는 사실. 이제 네차례에 걸친 그와의 대화가 기록된 취재수첩을 불에 태운다. 그의 영령이 떠난 하늘에 날린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 “미군철수는 국내 정치용
강퍅함 뒤엔 여유 묻어나”
박지원 민주당 의원(왼쪽 둘째)이 지난 2000년 8월 언론사 대표들과 함께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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