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북한이 12일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예정대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2월20~25일)를 진행하되 한-미 연합 훈련 기간(2월24일~4월18일)에는 상봉 행사를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24~25일엔 상봉 행사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20~22일 1차 상봉 행사는 가능하지만, 23~25일 2차 상봉 행사는 열리지 못할 가능성이 생겼다. 지난해 9월 이미 한 차례 무산된 이산가족 상봉이 또 깨질 판이다.
이산가족들을 다시 절망에 빠뜨린 책임은 1차적으로 북한에 있다. 한-미 연합 훈련과 겹치도록 이산가족 상봉 날짜를 변경하자고 요구한 것은 북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애초 우리 정부가 한-미 훈련과 겹치지 않도록 제안한 2월17~22일을 지난 2월5일 적십자 실무접촉에서 2월20~25일로 바꾸자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한-미 훈련과 겹치지 않는 애초의 날짜를 굳이 겹치는 날짜로 바꾸자고 요구한 것은 충분히 ‘의도’를 의심받을 만한 일이다. 또 지난 5일 이산상봉 날짜를 합의할 때는 한-미 훈련을 문제 삼지 않다가 상봉 행사를 위한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지금 갑자기 이 문제를 꺼내든 것도 수긍하기 힘들다. 이산가족들에겐 지난해 9월 북한이 상봉 행사를 불과 나흘을 앞두고 무산시킨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 정부의 대응 역시 대범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북한의 요구로 남북이 합의한 날짜가 한-미 훈련과 겹친다면 한-미 훈련 날짜를 조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정부는 한-미 훈련 기간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고, 날짜도 이틀만 뒤로 미루면 겹치지 않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난 10일 보란 듯이 이산가족 상봉 일정과 겹치는 한-미 훈련 기간을 발표하고 북한에 통보했다.
남북이 이처럼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동안 60년 넘게 생이별해온 이산가족들은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애초 100명을 계획했던 남쪽 상봉자는 이미 지난해 9월 96명으로 줄었고, 이번에 다시 85명으로 11명이 더 줄었다. 5개월 사이 어떤 이는 세상을 떴고, 어떤 이는 건강이 나빠져 금강산 행사장까지 갈 수 없게 됐다. 남북은 입만 열면 이산가족 상봉이 ‘인도주의적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산가족 문제를 다루는 걸 보면 과연 그 ‘인도주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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