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통일대박론을 넘자
③ 새로운 한반도를 상상하자
‘한반도 통일’ 가상 시나리오
③ 새로운 한반도를 상상하자
‘한반도 통일’ 가상 시나리오
2020년 12월31일 백두산 대지진
북한 재건을 감당할 곳은
남한과 중국밖에 없어 보였다
북은 전격 통일협상을 제안했다
‘1국 3체제’를 실험했다
남북 각각 기존체제를 유지하되
그것과 전혀 다른 3체제로
DMZ 평화행정구역을 건설했다
통일의 계기는 백두산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자연재해였다. 2020년 12월31일 백두산에서 강도 9.0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화산재가 12시간 안에 일본에 도착할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남쪽은 전자산업에도 큰 타격이 될 것으로 우려했고, 중국 언론은 동북3성에 건립한 핵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연일 보도했다. 최대 피해자는 당연히 북쪽이었다. 백두산 주변지역은 마을들이 초토화됐고,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500만명이 이재민이 됐다. 2021년 1월 한씨는 <조선중앙방송>에서 내보내는 북쪽 지도부의 대국민 특별담화를 지켜봤다. 백두산 폭발 이후 북쪽이 재빨리 재난회복 대책을 내놓은 자리였다. 북쪽 지도부는 사람 중심의 재난 회복과 무조건적인 국제협력을 천명했다. 한씨는 그 메시지를 보면서 북쪽 지도부가 예전과는 크게 변한 것을 느꼈다. 이후 국제사회는 북쪽과 재난복구 협상을 시작하고 유엔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원조기구들이 식량, 물, 의약품 등을 제공했다. 북쪽은 유엔군의 평화유지군 활동을 허락했지만, 남쪽과 미국에서는 인도적 지원만 받아들였다. 북쪽 지도부의 헌신적인 재난복구 노력과 국제사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 재건’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무엇보다 엄청난 복구 재원이 문제였다. 국제사회가 발벗고 지원에 나섰지만 그것은 긴급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복구를 감당할 만한 곳은 남쪽과 중국밖에 없어 보였다. 그동안 북-중 경협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남북경협도 회복돼 발전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어느 쪽과 경제적 결합력을 더 높일 것인지를 놓고 북쪽의 당, 군부 등 주요 세력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북쪽 주민들 사이에 ‘그래도 우리 민족’이라는 공감대가 빠르게 확산됐다. 남쪽 정부가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진행했지만 1990년대 후반기 이후 지속해온 대북 인도적 지원 덕에 북쪽 주민들 사이에 ‘친 남한 정서’가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 지도부는 이런 대중적 요구를 수용해 중국이 아닌 남쪽을 선택했다. 남쪽에 전격적으로 통일 협상을 벌일 것을 제안한 것이다. 남쪽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논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북쪽을 새로운 투자처로 인식하는 남쪽 대자본들과 민족의 재결합을 요구하는 남쪽 주민들은 정부에 북쪽의 통일 논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남쪽 정부도 빠르게 화답하여 베이징과 워싱턴에서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남북은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4대강국에 대해 ‘인도적 차원의 복구 재건’에 주안점을 둔 적극적 외교를 펴 4강도 이 큰 흐름을 용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백두산 대지진이 계기가 됐지만, 이렇게 빨리 남북이 통일협상에 합의한 것은 그동안 남북 모두 통일의 필요성을 크게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남북은 모두 통일이라는 과정을 통해 함께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크게 가졌다. 그것은 그동안 남북 정부가 걸어왔던 굴곡 많은 정치 여정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남쪽은 풍요로운 경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기업 중심의 경제가 낳는 많은 폐해도 심화돼 갔다. 더욱이 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방식은 외국의 경기변동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2018년 <포천>의 세계 500대 기업에 한국 기업이 30개 포함됐다. 대표적인 것이 삼성이다. 2019년 삼성전자는 디지털 텔레비전, 반도체 칩, 스마트폰을 넘어 태양전지, 하이브리드자동차용 충전지, 엘이디(LED) 조명기술, 바이오의약 및 의료기기 부문에서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선 나노-바이오-정보통신의 융합기술이 발전하여 기술 사용을 통한 만족도가 행복의 척도가 돼 있었다. 그런데도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낮아지고 있었다.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투자할 곳을 찾기 힘들다는 푸념이 터져 나왔다. DMZ에 미리 세워본 통일국가…남북 주민 10%가 자발적 이주 ‘2030년 통일’ 가상 시나리오 더욱이 풍요로움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커져 갔다. 기술 발달에 따른 고용없는 성장과 더불어 저출산과 고령화는 노동력 부족, 내수시장 위축 등 구조적 침체를 불러오고 있었다. 적극적인 이민정책, 고령층 인구와 여성들의 경제활동을 독려했지만 근본적인 인구감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남쪽 사회는 여전히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였고, 빈부격차도 더 심해져가고 있었다.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1%만을 위한 정치, 경제가 현실화되는 듯했다. 이에 따라 대자본과 시민사회에서 거의 동시에 ‘통일’에 대한 얘기가 터져나왔다. 통일을 통해 새로운 투자처를 확보하자는 것이 대자본의 바람이라면, 통일에서 새로운 사회 비전을 세우자는 게 시민사회의 요구였다. 북쪽도 어려움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장경제가 주도적인 경제시스템이 되면서 주민들의 비판의식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비판적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다가, 다시 보수파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나마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북쪽 주민들의 인터넷, 스마트폰 사용 덕이 컸다. 북쪽 당국은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외부접촉을 제한하려 했지만, 언제나 그것을 뚫고 나가는 사회의 기술변화가 더 빨랐다. 이에 따라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처한 위치를 알게 되는 북쪽 주민들이 더욱 늘어났다. 한국남씨도 그 즈음 북쪽에 있는 친척,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곤 했다. 한씨가 그 통화를 통해 북쪽 소식을 알게 됐고, 북쪽의 친척과 친구들 또한 남쪽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깨어난 민심이 중국의 개방 압력과 함께 북쪽 지도부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힘이었다.
2030년 2월20일 국민투표장
하늘에선 함박눈이 내렸다
오늘이 바로 8천만 온 겨레가
통일한국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다
탈북자 한국남씨는
투표용지 찬성에 기표를 했다
마음은 고향 함경도로 달려갔다
북쪽의 경제발전 전략은 2013년부터 본격화한 개방정책, 특히 북-중 국경지역 개발전략에 근거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거의 중국만이 투자를 했다. 그러나 곧이어 남쪽 자본이 들어왔다. 그러자 러시아, 일본 등의 자본이 에너지, 광업, 통신, 인프라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초기에 투자를 많이 한 중국이 쥐고 있었다.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특구를 중심으로 북쪽 땅을 상당히 사들이기까지 했다. 북쪽 경제의 중국 예속화에 대한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북쪽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2020년에 들어서서 5%대의 안정된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 역시 이 과정에서 불평등 심화를 경험한다. 특히 도시화에 따른 도농격차가 커졌다. 이런 불평등의 정점에는 북쪽의 관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많은 이권을 챙기면서 여전히 특권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북쪽도 식량과 자원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소득재분배가 문제가 되는 사회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북쪽은 경제적으로 동북아지역에서 낙후된 지역이었다. 성장률이 10% 이상씩 치고 나가야 다른 나라를 빠르게 추격할 수 있을 텐데, 5% 남짓한 성장률로는 다른 나라를 쫓아가기 버거웠다. 중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최대가 되는 지점까지만 투자를 하고, 남쪽 역시 분단이라는 제약 아래서 투자량을 획기적으로 늘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북쪽 주민들과 지도부도 뭔가 획기적으로 투자를 늘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두산 대지진이 일어나고, 남북이 빠르게 통일이라는 비전에 합의해 나가게 된 것이다. 2021년 11월 남북은 중국과 미국의 양해 아래 통일한반도 건설을 천명했다. 2022년에는 통일 준비를 실행할 ‘한반도통일공동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는 정부, 정당, 기업체, 시민사회, 국제기구를 대표하는 50명으로 구성된다. 이 기구는 남북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대통합 원칙과 전략을 이행할 통일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 핵심 열쇳말은 ‘새로운 건설’이었다. 상향식 방식에 근거한 민주적 절차, 새로운 정치체제와 헌법, 북쪽의 현대화와 남쪽 정치지형의 획기적 전환 등에 남북이 합의했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1국3체제’를 실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남북은 1단계인 교류·협력·화해 과정을 거쳐, 2단계로 기존 남북 체제와 함께 비무장지대에 ‘평화행정구역’을 설정하는 1국3체제를 실험하기로 한다. 이 실험을 거친 뒤 3단계로 완전통일 국민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통일1단계는 남북이 적대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시기였다. 통일은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는 단순한 체제논리가 아닌 것으로 인식됐다. 북쪽도 변하고 남쪽도 새로워져야 한다. 이를 통해 통일한반도가 세계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통일공동위원회는 통일 경로에 대한 비전과 정책개발을 위하여 ‘범국민적 통일시나리오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동아시아의 부족한 전력문제를 위해 남북과 러시아, 몽고, 일본, 중국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전력협력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이를 통해 북쪽은 만성적인 전력난을 해소해 나갔다. 북쪽의 경제회복을 위한 ‘북한재건 프로그램’이 실시됐고, ‘국가정체성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서 남북의 문화, 정체성 차이를 줄이고 사회통합을 꾀했다. 통일2단계에서는 과도기적 정치체제로 ‘1국 3체제’를 실험했다.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연방제를 어떻게 합칠 것인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다양한 형태의 비전이 갑론을박의 논쟁을 통해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 결과가 ‘1국 3체제’였다. 통일 이전까지 남북이 각각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제3체제로 시장경제나 계획경제와 전혀 다른 사회구조와 가치를 추구하는 ‘비무장지대 평화행정구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구역에는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통일신탁기금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남북 총선거에 부칠 통일안이 마련됐다. 통일 3단계인 완전통일 중립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비무장지대 평화행정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남북 주민들의 통일 열망은 더 커졌다. 경제민주주의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중심으로 경제제도를 짜고 성, 계층, 세대, 지역별 차이를 없애 나가는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안을 만들었다. 군 병력은 160만명에서 30만명으로 감축하면서, 군사비를 줄이고 생산적인 산업투자를 늘리자는 것이었다.
손현주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미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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