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리커창 중국 총리가 14일 오전 필리핀 마닐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0차 ‘아세안+3’ 정상회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마닐라/연합뉴스
7박8일간의 동남아 3개국 순방을 마무리한 문재인 대통령은 14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꽤 성과와 보람이 있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문 대통령은 아세안과의 관계를 대폭 강화하기로 한 ‘신남방정책’에 대한 각국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다자 외교무대에서 개별 양자접촉을 통해 외교의 지평도 넓혔다. 무엇보다 ‘사드 갈등’을 봉합하고 1년4개월여 꽁꽁 얼어붙었던 한-중 관계를 풀어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은 이번 순방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꼽을 만하다.
문 대통령은 순방 기간 동안 중국의 서열 1·2위인 시진핑 국가주석(11일)과 리커창 국무원 총리(13일)를 잇달아 만나 “양국이 모든 분야에서의 교류협력을 정상 궤도로 조속히 회복시키자”는 데 합의했다. 지난해 7월 한-미가 사드 배치를 전격 발표한 뒤 1년4개월여 이어진 ‘사드 갈등’을 봉합하고, 한-중 관계의 정상화를 정상 차원에서 공식화한 것이다. 특히 다음달 중순께 방중 정상회담을 하기로 함에 따라, 한-중 두 나라 관계가 조만간 완전히 복원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다음달에 있을 방중이 양국 관계 발전에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 13일 문 대통령과 리 총리의 회담은 머리발언에서 두 정상이 약속이나 한 듯 ‘봄’에 빗대 양국 관계 복원을 희망하면서 ‘훈풍’을 예고했다. 문 대통령은 중국 고전을 인용해 “온갖 꽃이 함께 피어야 진정한 봄”이라며, 정치·외교·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의 조속한 관계 복원을 촉구했다. 이에 리 총리는 “봄이 오면 강물이 먼저 따뜻해지고, 강물에 있는 오리가 따뜻한 봄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화답했다.
취재진이 퇴장한 뒤 본격적인 회담에선 △한-중 관계 복원 △경제 현안 △북핵 문제 등을 두고 50분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관계 복원 대목에서 리 총리가 사드 문제를 거론하기는 했지만, 과거 갈등 과정을 되돌아보는 수준의 언급이었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청와대 관계자는 “양국 간 사드 문제에 관한 봉인 합의는 완료형이 아니라 봉인 과정에 있다”고 표현했다. 문 대통령도 “사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며, 중국이 사드에 대해 찬성한다고 바뀐 것도 아니다”라며 “언론이 표현하듯 봉인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제 현안과 관련해선 문 대통령이 △관광 교류 △자동차 배터리 보조금 △반덤핑 수입규제 등 사드 갈등으로 당면한 우리 기업의 구체적인 애로 해소를 직설적으로 요구했지만, 리 총리는 “일부 구체적이고 예민한 문제들을 피하긴 어렵지만, 중-한 간의 실질협력 전망은 아주 밝다”는 원칙적인 답변으로 예봉을 피해갔다. “사드 보복은 없다”는 게 중국 당국의 공식 입장임에 비춰, 리 총리의 발언은 중국 정부가 공식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더라도 이미 정책 방향을 바꿨으므로 우리 기업들에 대한 유·무형의 불이익이 사라질 것임을 내비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회담에 배석했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2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논의를 이어갈 것”이라며 “(12월에는) 동행을 원하는 기업인들이 함께 방중할 수 있도록 전세기를 두 대 띄우는 방안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는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과 리 총리는 북한이 도발을 중단하고 비핵화 의지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국면 전환을 위한 창의적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주장하는 ‘선 비핵화’가 아니라 ‘비핵화 의지’를 대화 재개의 전제로 삼은 점이 눈에 띈다. 한-중 간 사드 문제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현재의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조건에서 대화 재개 등 ‘창의적 해법’을 찾아보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이미 북핵 해법으로 제시한 ‘동결-폐기 2단계론’을 재차 강조하는 한편, “지금은 북한을 대화의 길로 이끌어내기 위해 제재·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할 때”란 기존 입장도 되풀이했다.
문 대통령은 또 지난 7일 한-미 정상회담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언급한 ‘인도-태평양 안보체제’ 참여 문제와 관련해선 “우리로서는 처음 듣는 제안이었다. 공동번영을 위한 협력이라면 다른 의견이 없겠지만, 한-미 동맹을 인도-태평양 협력의 축으로 얘기해 정확하게 알기 어려워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고 설명했다.
마닐라/김보협 기자, 정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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