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은 6일 오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전날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별사절대표단과 접견 및 만찬을 했던 10분 분량의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만찬을 끝내고 특사단을 차에 태운 뒤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장면. 조선중앙텔레비전 연합뉴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별사절단에 북-미 간 비핵화 대화를 할 용의를 표명하면서 북핵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해결 전망이 밝아졌다. 북핵 문제는 사실상 2008년 말 6자회담 종결 이후 10년 동안 외교 협상 무대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북한과 미국은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직후인 2012년 2월 본격적인 북핵 회담 재개를 위해 ‘2·29 합의’를 했지만 같은 해 4월 북한의 ‘광명성-3호’ 발사로 ‘없던 일’이 됐고, 이후 북핵 회담은 영영 국제 외교무대에서 재개되지 못했다.
대북 수석특사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6일 돌아와 북핵 문제와 관련해 밝힌 남북 간 합의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은 우선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동안 북한은 김정은 체제 들어 핵실험을 4차례나 하는 등 핵 보유 의지를 밝혀왔다. 2012년 4월엔 헌법에 핵 보유국임을 명기했고, 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선 핵무력 개발과 경제개발을 동시 추진하는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했다. 그러나 이번에 김정은 위원장은 특사단에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다.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며 비핵화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이번에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밝힌 것은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행보와 다른 전향적인 것이다. 그동안 미국이 사실상 북-미 대화의 조건으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요구해온 점에 비춰 볼 때 북-미 대화로 가는 걸림돌을 제거한 조처로 해석된다. 북한은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북측은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재개하는 일은 없을 것”임도 명확히 했다. 북한의 미 본토에 대한 핵공격 능력을 핵심 안보 우려 사안으로 꼽아온 미국으로선 반길 만한 발언이다.
북한과 미국은 최근 들어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쳐왔다. 그러나 북·미는 유리한 입지 선점을 위한 힘겨루기를 벌이면서 대화의 성사 여부는 불투명했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올바른 조건’에서만 대화하길 원한다”고 토를 달았고, 북한 외무성은 3일 대변인 명의로 “미국과 전제조건적인 대화탁에 마주 앉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반발한 바 있다. 이번 남북 합의는 이런 자존심 대결이 작동할 여지를 제거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한이 이번에 밝힌 비핵화 의지는 ‘양날의 칼’ 성격도 있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밝히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는데, 이는 그동안 북한이 핵 보유 이유로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꼽았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발언이다. 뒤집어 말하면,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지 않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핵 보유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 보유 책임을 미국 쪽에 떠넘긴 것이다.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대화 등 본격적인 대화 국면이 전개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한·미 등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북한의 체제 안전보장을 담보해줄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과제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 실장의 발표대로 북한이 “비핵화 문제 협의 및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했다”고 밝힌 대목은 북한이 장기적으로 북-미 간 정상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시야에 넣고 이번 한반도 해빙 국면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도로 읽힌다. 사실 북-미 관계 정상화는 김일성 주석 때부터 북한이 추진해왔던 외교적 목표였다. 그러나 북핵·미사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이뤄지기 어려운 꿈이다. 결국 북-미 관계 정상화의 길은 북핵 문제 해결 과정과 함께 진전될 수밖에 없는 긴 노정으로 보인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이번 북한의 입장에 대해 “미국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 쪽도 이번 합의에 대해서 아주 100%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의미 부여를 하면서 우리 쪽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특사단이 빨리 미국에 가는 것은 이번 합의문에 대한 미국 쪽의 긍정적인 입장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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