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5일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를 만나 인사하고 있다. 북쪽에서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배석했다. 왼쪽은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조기에 만나자”며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달한 것은 김 위원장의 적극적인 국면 전환 의지로 풀이된다.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 행보로 국면 반전을 주도해 남북관계 및 북-미 관계 개선, 한반도 정세 안정, 국제적 고립 탈피, 경제제재 극복 등을 한꺼번에 거머쥐겠다는 다목적 포석인 셈이다.
김 위원장의 이런 태도는 지난해 내내 문재인 대통령의 대화 제의를 외면했던 것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여기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압박이 강화되면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돌파구가 절실해졌고, 때맞춰 열린 평창 겨울올림픽을 국면 전환의 창으로 적극 활용한 문 대통령의 노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지난해 11월 말 ‘핵무력 완성’ 선언으로 표현된 군사적 자신감도 한몫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북한은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과 11월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으로 ‘핵 억제력’을 갖추게 됐다고 장담했다.
김 위원장은 애초 올 1월1일 신년사에서 북-미 대화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남한을 향해선 올림픽 참가 및 대표단 파견, 남북 대화를 제안하며 화해의 손짓을 했으나, 미국에 대해선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의 핵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위협하며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남한-미국 분리 대응’ 기조였다.
이런 김 위원장이 북-미 대화 추진 쪽으로 급선회한 데는 문재인 정부의 적극적인 설득과 중재가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 간에 조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또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만나서도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에 펜스 부통령은 지난달 12일 귀국길에 “북한이 원하면 우리도 대화할 것”이라고 대화의 운을 뗐다. 이어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지난달 25일 문 대통령을 만나 “북-미 대화를 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중재 노력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국면 전환의 출발은 김정은 위원장이 했지만, 이후 일정과 의제 등은 우리 정부에 동조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김 위원장이 남북 대화나 북-미 대화에서 실무 단계의 의견 조율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전격적인 ‘속도전’과 ‘고공전’으로 나온 것은 파격적이다. 여기엔 핵 문제나 제재 문제, 북-미 수교 문제 등 상호 관심사를 최고 국정책임자가 직접 나서 큰 틀에서 한꺼번에 풀어내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탐색·예비대화를 거치지 말고 바로 일괄타결하자는 뜻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미국과 전면적인 대등한 협상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공간 자체를 최대한 열어가면서 통 큰 협상으로 핵 문제, 체제 안전 문제, 북-미 수교 등을 풀어보겠다는 의도”라고 말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나 2005년 ‘9·19 공동성명’ 등 실무자들 간의 합의가 결국엔 실패로 끝난 과거 경험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합의의 수준과 구속력을 최고 수준으로 높일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과거 남북 정상회담이 임기 말에 이뤄짐에 따라 정권교체 뒤 합의 사안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전례도 교훈으로 삼은 것 같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모두 조기에 해냄으로써 관계 개선의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판단인 셈이다.
박병수 선임기자,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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