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24일, 북-미 정상회담 준비차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북-미 관계의 대전환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됐던 당시 접촉은 그해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무산 됐다. 평양/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항구적인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정은 위원장과 금년 5월까지 만날 것”이라고 밝히면서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돌연 가시권에 들어왔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전쟁위기설’이 불거지며 악화 국면으로 치닫던 북-미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는 모양새다. 그러나 북-미 간에는 18년 전 이미 한차례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된 전례가 있다.
당시 북-미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적극 추진됐다. 북한은 같은 해 10월 당시 권력 서열 2인자였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미국에 보내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을 면담하고 북-미 간 적대관계 종식, 상호불신 해소와 신뢰 조성, 주권존중 및 내정 불간섭, 경제협력 등 포괄적인 관계 개선 내용이 담긴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서명했다. 조 부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따라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을 북한에 보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장관의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예고 없이 찾아가 면담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러나 한 달 뒤 11월 대선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북-미 대화는 막을 내렸다.
2000년 당시 북·미가 대화와 타협 국면으로 들어서며 정상회담 직전까지 간 데에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의혹’ 해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다시 추진되는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북·미는 1994년 ‘제네바 합의’로 북핵 동결에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1998년을 전후해 미국이 북한의 금창리에 비밀 핵시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도 대포동 미사일을 전격 발사하면서 북-미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된다. 그렇지만 1999년 10월 대북 관여정책을 권고한 ‘페리 보고서’가 나오고, 금창리 핵 의혹 해소, 북의 미사일 개발 유예 약속 등이 이어지면서 북-미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개선됐다. 의혹이 풀리니 관계 개선이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번에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화 국면이 형성됐다.
물론 현재 북-미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다. 두 나라 최고 권력자 모두 대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호 신뢰가 없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각) 트위터를 통해 “제재는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도 “우리는 미국의 핵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정정당당하게 핵무기를 보유하였다”(<노동신문>)고 보도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는 사실은 북-미 정상회담의 ‘걸림돌’을 제거한 셈이지만,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북-미 정상회담 일정인 5월까지 북핵 문제에서 진전이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 예정대로 정상회담이 이뤄지려면 북·미가 특사 교환 등 사전 단계의 고위급 협상에서 어느 정도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의 핵능력은 수소폭탄을 제조할 정도에 이르렀다. 18년 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진전된 상태다. 2000년 당시만 해도 북한은 막 핵개발을 추진 중이었고, 미사일 기술도 초보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북한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상태다. 또 미국의 대북제재도 2000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해진 상황이어서 이를 핵 관련 협상과 연동시켜 풀어나가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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