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노지원의 진토닉_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르포
홍천 풍천리 ‘벙커고지’ 굴토 한창
전문가·장병들 삽·호미로 세심한 작업
뼛조각 나오자 주변 샅샅이 살펴
DJ정부 발굴 나서 참여정부 때 감식단
군 장병 등 연간 10만명 작업 동원
유품 단서로 감식·유전자검사 더 해
국군·북한군·중국군 나눠 신원 찾기
북·미 공동 유해발굴 10년 결과로
북에서 돌아온 국군 전사자 28구
신원이 밝혀진 건 5명 불과
남북 공동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땐
북쪽땅 묻힌 국군도 고향 돌아올까
홍천 풍천리 ‘벙커고지’ 굴토 한창
전문가·장병들 삽·호미로 세심한 작업
뼛조각 나오자 주변 샅샅이 살펴
DJ정부 발굴 나서 참여정부 때 감식단
군 장병 등 연간 10만명 작업 동원
유품 단서로 감식·유전자검사 더 해
국군·북한군·중국군 나눠 신원 찾기
북·미 공동 유해발굴 10년 결과로
북에서 돌아온 국군 전사자 28구
신원이 밝혀진 건 5명 불과
남북 공동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땐
북쪽땅 묻힌 국군도 고향 돌아올까
6·25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가 65년여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6일 북한을 방문하는 데 맞춰 지난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미군 유해 송환이 이뤄질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북쪽 지역에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실종 미군은 4100여명(2000명은 비무장지대) 정도 일 것으로 추산된다.
휴전선 너머 북쪽 지역에는 한국군도 묻혀 있다. 대략 3∼4만명(1만명은 비무장지대)이다. 국군 전사자가 언제 돌아올지는 아직 모른다.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 남북 정상이 올해 두 차례 만난 뒤 문재인 대통령은 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남북 공동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추진 의지를 밝혔다. 남북관계가 개선돼 비무장지대 남북 공동 유해발굴이 이뤄지면 북쪽 땅에 묻힌 국군 전사자도 고향 땅에 돌아올지 모른다.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이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를 기사에 담았다.
■ 두 일병 이야기
6·25전쟁에서 전사한 송 일병과 윤 일병은 같은 부대 전우였다. 둘은 중공군의 2차 공세(1950년 11월25일∼12월24일)에 맞서던 중 같은 날, 북녘 땅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한 사람은 돌아오고, 한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 송 일병 이야기
송씨네 9남매 중 첫째 아들인 경섭은 전쟁이 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950년 7월15일, 전장으로 불려 나갔다. 스무살이 되던 해였다. 부모님을 도와 논농사를 짓던 ‘농사꾼’ 경섭은 졸지에 이등병이 됐다. 미1기병사단 소속 한국군(카투사)으로 ‘K110○○○○’란 군번을 받았다. 그와 같은 한국군들은 유엔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함께 싸웠다.
아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쪽으로 진격하던 그해 11월, 송 이병은 입대 4개월 13일만인 11월28일 평안북도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송 이병에게 1계급 특진 계급장을 줬다. 송 이병은 죽어서 일병이 됐다. 그의 부모는 전쟁이 멈추고 4년 만인 1957년에야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직접 면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했다. 평생 자식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송 일병 부모는 10여년 전 숨을 거뒀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송 일병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뼈와 살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북한 땅에 잠들어 있다. 송 일병의 동생들은 형, 오빠의 유해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전사자 유가족 데이터 베이스에 올려뒀지만, 언제 소식이 올지 기약이 없다.
# 윤 일병 이야기
28살 젊은이, 세 아이의 아빠였던 고 윤경혁 일병도 북녘 땅에서 숨졌다. 전쟁이 난 해 11월28일, 송 일병과 같은 날이었다. 1950년 9월 아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반격 작전을 개시했지만, 11월말 중공군의 압박으로 다시 후퇴하는 과정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 일병은 송 일병보다 운이 좋은 편이다. 북한과 미국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6·25전쟁 전사자 유해 공동발굴을 통해 전사자 유해를 찾아냈고, 이를 229개 관에 담아왔다. 2001년 평남 개천 지역에서 발견된 윤 일병의 유해는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으로 보내져 정밀 감식과정을 거쳤다. 신원확인 결과 윤 일병임이 확인됐다. 그는 오는 7월13일 한-미 6·25 전사자 유해 상호 송환 행사를 통해서 가족 품으로 돌아온다. 꼬박 68년만이다.
현재까지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가 남쪽에 돌아온 것은 미국을 통한 사례가 전부다. 윤 일병은 북쪽 땅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28번째 국군 전사자다. 미국은 10여년 전 북한과 공동으로 발굴한 미국 전사자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국군 유해가 일부 섞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은 2012년(12구), 2016년(15구), 올해 7월 1구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국군 유해를 돌려보냈다. 이 가운데 신원이 밝혀진 건 윤 일병을 포함해 5명이다. 나머지 23구는 국군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정확한 신원은 아직 모른다. 전사자 유가족의 유전자가 정부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돼 있지 않거나, 유품으로 전사자를 추정하기 어려운 까닭에서다.
■ 유해발굴 현장 르포…강원도 홍천 ‘벙커 고지’를 가다
“이 길을 따라, 죽은 군인들이 포개진 채 널브러져 있었지.” 강원도 홍천군 풍천리에 사는 최덕재(70)씨가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웃 박씨(75)에게 들은 말이다. “이 동네에 6·25 때 죽은 군인들이 많았다”, “내가 어릴 때 직접 봤다”는 류의 이야기를 숱하게 전해 들었다. 최씨는 홍천 지역에서 탐문 조사를 하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 자신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제보했다. “참호에 전투화가 삐져 나온 것을 봤다”, “산골짜기에서 사람 뼈를 봤다”는 식의 지역 주민 제보는 전사자 유해발굴의 시작점이다.
미국이 북-미 공동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6·25 전사자 유해를 찾고 있는 것처럼, 한국도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부터 6·25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에는 국방부에 유해발굴감식단이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국유단은 주민 제보와 이 지역 전쟁 역사, 참전용사 증언 등을 토대로 유해를 발굴할 지역을 선정한다. 유해를 발굴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유해가 발견되면 그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등을 식별해낸 뒤 현장에서 예를 갖춰 약식 제례를 지낸다. 유해는 인근 부대에 있는 임시 봉환소, 감식소를 거쳐 중앙감식소로 보내진다. 정밀 감식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면 유가족에 뜻에 따라 현충원에 안치한다.
28일 오후 1시30분, 강원도 홍천군 풍천리 벙커고지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굴토 작전이 한창이었다. 국유단 소속 전문가 10여명과 홍천 지역에 있는 11사단 소속 현역 장병 100여명은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작전’을 시작했다. 발굴병들은 능선 아래 급격한 경사면을 삽으로 15㎝ 정도까지 파냈다. 감식관은 발굴에 앞서 어디까지가 6·25전쟁 이후 새로 쌓인 흙인지 확인한다. 흙에도 역사가 있는 셈이다. 삽으로 깨부순 토층이 작은 흙덩어리가 돼 딸려 나오면 발굴병들은 이를 다시 호미로 잘게 부쉈다. 작은 치아 한 점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살폈다.
‘벙커고지’라는 이름이 붙은 이 지대에서 67년 전 아군과 적군이 쟁탈전을 벌였다. 이 고지를 점하던 미군은 1951년 5월17일 밤 9시30분께 북쪽에서 내려온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날 아군이 고지를 잃으면서 사상자도 많이 나왔다. 이튿날 새벽 1시, 아군은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되찾았다. 이번엔 적군이 많이 죽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며 다시 진지로 쳐들어왔고 중대장은 ‘진내사격’을 요청했다. 진내사격이란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 아군도 함께 희생하는 방어전략이다. 아군이 적으로 둘러싸여 빠져나갈 길이 없을 때 후방에 있는 아군이 이 구역에 포탄을 퍼부어 진지를 지킨다.
진지에 있는 아군이 전화기로 진내사격을 요청하면, 적군뿐 아니라 아군의 머리 위로도 포탄이 떨어진다. 함께 죽는다. 벙커고지 유해발굴 과정에서 아군과 적군 유해, 유품이 모두 발견되는 이유다. 형태를 갖추고 있는 유해는 드물다. 포탄에 맞아 몸이 산산히 부서진 탓이다. 당시 아군은 이 지역에 1만1891발의 탄약을 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19일 새벽 중공군은 800여구의 시체를 남긴 채 철수했다.
유해와 함께 발견된 총알의 규모를 보면 누구의 피해가 더 컸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아군 총알이 많이 발견됐다면 적군의 피해가 컸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식이다. 벙커 고지에서는 아군 총알인 엠(M)-1 탄과 적군 총알 모시나칸트 탄이 모두 발견됐다. 누구도 완벽히 승리하지 못한 전투였던 셈이다.
벙커고지 능선에서 2∼3m께 떨어진 비탈면 한쪽에 노란색 ‘출입금지’ 테이프가 쳐졌다. 마치 사건 발생 장소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4㎡ 규모 공간 안에서 발굴병 두 명이 붓으로 흙을 조심스레 쓸어냈다. 묻혀있던 나뭇가지가 맨살을 드러냈다. 영양분을 찾으려 땅 속을 헤집고 뻗어 나가던 나무뿌리는 으레 사람 뼈를 둘둘 휘어감곤 한다. 발굴병은 속에 유해가 있을 지 몰라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끊어낸다.
노란 테이프가 쳐진 이 곳에서는 지난 25일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 한 점이 나왔다. 오른쪽 허벅지뼈였다. 길이는 대략 23㎝. 유해와 함께 허리띠 버클도 나왔다. 전쟁 당시 미군이 제공한 피복에 붙어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정확한 감식 절차를 거쳐야하지만 현장에선 이 유해가 아군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뼈 한 조각이라도 한 명의 전사자다. 60여년 동안 차갑고 어두운 산야에 누워 있던 그가 세상으로 나왔다.
발굴 현장에서 일단 유해가 나오면 하얀 석회가루를 뿌려 해당 지점을 눈에 잘 띄게 표시한다. 발굴병은 발견 지점을 중심으로 가로, 세로 2m씩, 4㎡ 규모를 샅샅이 살핀다. 그 공간 안에 전사자의 유해나 유품이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은 한창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철을 제외하고 1년에 8개월간 진행된다. 연간 일반 부대 병사들을 포함해 10만명이 동원된다.
발견되는 유품으로는 전투화부터 단추, 군장 고리, 전투식량 껍데기, 도장, 진통·소염제를 담고 있었을 유리 약병, 차표, 편지, 카메라 등 다양하다. 이들은 전사자의 신분을 찾기 위한 소중한 단서다. 가령 고양이 눈처럼 생긴 단추를 보고 아군임을, 마오쩌둥 단추를 보고 중공군임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신분 확인은 정밀 감식을 해봐야 안다. 복장으로 아군, 적군을 단정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재민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육군 상사)은 “전쟁이 났을 때 아군은 제대로 전투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며 “전투복, 전투화 등 군수품이 부족했을 수밖에 없다. 참전 용사의 말을 들어보면 아군은 몹시 추울 때 죽은 적군의 전투복, 전투화를 가져다 입고, 신었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감식 결과 신분이 밝혀지면 중국군은 중국으로 송환한다. 중공군 유해는 2014년 처음 중국으로 보내졌다. 그동안 5차례에 걸쳐 현재까지 589구를 중국에 보냈다. 북한군은 파주 적군묘지에 임시매장한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북한군의 유해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국유단은 2013∼2014년, 2017∼2018년 4년에 걸쳐 벙커고지 반경 2㎞에서 6·25 전사자 유해 60여구를 수습했다. 아군도 있었고, 북한군, 중공군, 식량과 탄약을 나르던 노무자도 있었다.
발굴병은 25일 발견된 유해를 하얀색 한지로 싸 소관(작은 관)에 모셨다. 입관이다. 가로 30㎝, 세로 60㎝, 높이 25㎝ 크기의 소관에는 하얗고 푹신한 솜이 한 가득 들어있었다. 유해를 감식소까지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서다. 비닐에 담긴 유품과 예단도 소관에 함께 들어간다. 관 뚜껑을 닫은 뒤에는 ‘6·25 전사자의 널’이라 쓰여진 명정을 붙인다. 명정은 관의 이불이다. 마무리는 관 전체를 감쌀 수 있는 크기의 태극기로 임시 봉인하는 ‘관포’다. 태극 문양이 소관의 정 중앙에 놓이도록 하고 14개의 압정으로 단단히 고정한다. 발굴병 구민석(21) 일병은 “기계로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춰 1㎝ 오차도 없게 한다”고 했다. 관포하는 과정에만 15분 정도가 걸렸다.
“차렷! 호국영령께 대하여 경례!” “충성!”
약식제례를 위한 상에는 술과 명태, 위패가 단촐하게 올랐다. 발굴에 참여하는 장병들이 소관 앞에 도열했다. 부대장이 제사상에 술 한 잔을 올린다. 묵념. 부대장이 “봉송 준비!”라고 외치자 장병들은 유해가 지나갈 길목에 나란히 서 거수경례를 했다. 유해 발견부터 약식제례까지 이틀에서 사흘, 유해가 중앙감식소로 가기까지는 일주일이 걸린다.
25일 이 전사자를 처음 발견한 이형걸 상병(20)은 “6월25일이라 평소보다는 더 차분한 마음으로 작전을 하고 있는데 나무와 비슷한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며 “만져보니 나무와 비슷한데 나무처럼 잘 부러지지는 않는, 나무와 돌 사이 강도였다. 나무와 달리 잔가지가 없어서 감식관에게 보고하니 허벅지뼈가 맞다고 했다. 유해를 찾으면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숙연해졌다”고 말했다.
<한겨레>가 현장을 방문해 취재하던 28일 오후에도 만년필과 유리병과 함께 전사가 팔뼈 한 구가 나왔다.
■ 중앙감식소, 이름을 찾는 곳
“시작은 있었는데, 마무리가 없었어요. 이 분들이 누군지 찾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임나혁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 감식관)
지난 27일 오전 찾아간 중앙감식소에서는 여느 때처럼 감식 작업이 한창이었다. 감식대 위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이들 몸의 파편이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길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유해발굴감식단 건물 1층에 있는 중앙감식소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밝히는 곳이다. 정부 주도로 전사자 신원을 밝히는 기관으로는 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창설됐다.
이 곳에선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전사자의 유해를 분석해 연령, 성별, 키, 인종 등을 파악한다. 뼈 형태를 보면 대강의 연령을 알 수 있다. 임나혁 감시관은 “6·25 전사자의 연령이 대체로 낮다”며 “유해를 보면 참전용사들이 최소 15살에서 30살 정도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치아조차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거나 뼈가 채 다 자라지 않은 이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중앙감식소에서는 현미경, 비교분광기, 3D 스캐너, 치아 엑스-레이 등 첨단 장비를 동원해 유해 감식에 활용한다. 감식관은 일단 현미경으로 동물뼈인지, 사람뼈인지부터 구별한다. 뼈를 아주 얇게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뼈 구성 단위가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 3D 스캐너로는 머리뼈를 스캔해 사진을 보존한다. 중앙감식소는 머리뼈에 가상으로 살을 입혀 얼굴을 복원한 뒤 실제 사진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상용화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엑스-레이로 유해가 살아생전 병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지도 알아본다. 유가족의 증언을 통해 전사자가 특정 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이 또한 신원확인을 위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중앙감식소에서 유해의 유전자 시료까지 채취하고 나면 국방부 조사본부가 넘겨 받아 검사를 진행한다.
중앙감식소에 도착한 전사자의 유해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전투가 끝난 뒤 후퇴하는 쪽은 전사자의 시신을 챙기지 못하고, 이긴 쪽도 적군의 시체에 예를 갖춰 매장해줄 만한 여유가 없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지역에 널브러져 있는 유해를 본 주민들이 시신을 한데 모아 묻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해 경남 창녕에서는 전사자 37구가 한꺼번에 나왔고, 경기도 양주 신암리에서 75구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유해발굴 역사상 가장 많은 유해가 발견된 사례로 꼽힌다. 마을 주민들이 부패한 시신을 모아 땅을 파 묻었다는 이야기가 후대까지 전해졌고, 이를 알게 된 국유단이 나서 발굴한 사례다.
운이 좋게 천으로 잘 싸여 매장된 유해는 상대적으로 훼손이 덜 된 상태로 발견되기도 하지만, 작은 발가락뼈 하나로 남는 이도 있다. 누군가는 완전하게, 누군가는 파편으로만 남는 이유는 매장 환경 탓이 크다. 예컨대 모래가 많은 지역에 묻힌 유해는 물과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더 빨리 훼손된다. 미생물이 많은 지역도 그렇다. 산야를 떠도는 얕은 땅 속에 묻힌 유해는 야생동물에 의해 파헤쳐지곤 한다. 임정민 감식관은 “신원확인이 정말 어렵다”며 “안면골, 두개골, 넙다리뼈 등이 있어야 신원확인의 정확도가 높아지는데, 측정할 수 있는 부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남아있는 유해가 아주 적으면 여기서 추출할 수 있는 증거확보가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중앙감식소에서 감식 중인 유해 가운데는 뼈가 오랫동안 공기에 노출돼 까맣게 변색된, 2㎝정도의 작은 뼛조각 수준인 유해가 여럿이었다. 이런 경우 사실상 신원확인을 위한 최후의 보류인 유전자 검사도 어려울 수 있다. 군이 전쟁 시작 전 참전 병사들의 치아 기록 등 각종 신체 정보를 기록해뒀다면 다양한 방식을 통해 신원확인을 할 수 있었겠지만, 갑자기 난 전쟁은 우리 군이 그런 대비를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속에는 국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섞여있을텐데, 이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장유량 중앙감식소장은 “주민 제보, 실제 발굴 지점이 전쟁 당시 적군이 있던 지점인지 등 전사 기록과, 유해가 적군의 복장을 갖췄는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해당 유해의 유전자가 국군 전사자 유가족 데이터 베이스에 없어야 한다”며 “4단계 판정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판단한다. 국군일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배제한다”고 말했다.
국유단은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 기초과학지원연구원과 함께 동위원소 분석을 통한 신원확인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방법을 통하면 뼈에 축적된 동위원소 비율을 분석해 옥수수, 보리 등 그가 섭취한 음식이나 해당 지역 지하수를 알아낼 수 있다. 그가 어느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알 수 있는 획기적인 기법이다. 보통 같은 아시아계인 국군과 중공군, 북한군을 구별하기 쉽지 않을 때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기법이다.
■ 국선제, 이름을 잃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
국유단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름을 찾지 못한 전사자의 유해, 영혼이 머무는 곳이다. 들어가자마자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공간에는 간절함과 기다림이 스며있다. 항온항습기가 설치돼 온도는 20도 안팎, 습도는 40%로 유지된다. 오래된 문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처럼 생긴 이 곳은 국선제(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희생자를 선양하고 공경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 곳에는 8000여구의 이름없는 전사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선반에는 가로 53㎝, 세로 26㎝, 높이 21㎝ 크기의 박스 수천개가 놓여있다. 박스는 뼈의 산성화를 막기 위한 재질인 중성지로 만들어진다. 박스에는, 유해가 비닐에 담겨져 있고 부패를 막기 위해 제습제가 들어가 있다. 유해들이 국선제에 온 시기는 모두 제각각이다. 2000년부터 18년째 이름을 찾지 못한 전사자도 있다.
국유단은 18년 동안 남쪽 지역에서 전사자 유해 9874구를 찾았다. 이 가운데 123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자기 이름을 찾은 이는 발굴된 전체 전사자 유해 가운데서도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6·25전쟁에서 국군 13만7800명이 전사했고, 2만5000명이 실종됐다. 정부가 이들의 유해를 찾더라도 정확한 신원을 밝히려면 전사자 유가족이 유전자 시료 채취를 통해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을 해놔야 하는데, 2018년 5월 기준 정부에 등록된 전사자 유가족 유전자 시료채취는 4만1573건에 불과하다. 홍천/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고 윤경혁 일병. 국방부 제공
감식관이 6월27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에서 뼈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한 감식관들이 27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 안 3D스캐너실에서 유해를 입체적인 이미지로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6.25 참전 한국군 소속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27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에 놓여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미군 유해 등을 담은 중성지 상자가 6월27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 구석에 놓여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가족을 찾지못한 유해가 27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국선제 안에 보관되어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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