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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기무사 정치개입은 반국가적 행위…군 갈 길 멀어”

등록 2018-07-14 14:01수정 2018-07-16 12:02

[토요판] 커버스토리/ ‘군 정치중립’ 29년간의 싸움

군 정치중립 요구 ‘명예선언’
29년전 주도한 이동균 김종대
군의 댓글·민간인 사찰에 일갈
“진실 밝혀 책임자 엄벌해야”

1989년 죽음 각오 ‘명예선언’뒤
파면 중징계 받고 강제전역 돼
민주화유공자·복직 권고 외면
국방부, 지난 3월 “복직” 통고
‘잃어버린 29년’ 보상은 외면

▶부당하고 불법적인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 이전에도 싸우고 저항한 이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군의 정치중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은 두 사람이 처음이었다.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소속의 중대장과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동균 대위와 김종대 중위는 1989년 1월 5일 밤 서울 종로구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군 명예선언’ 기자회견을 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절박하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이들의 희생과 용기를 계기로 군은 차츰 민주화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분노하고 있다. 하나는 자신들의 복직 요구를 사실상 짓밟는 국방부의 태도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여전히 정치개입 습관을 못 버린 기무사의 행태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군이 갈 길이 아직 멀다”고. 인터뷰는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의 김종대씨 연구소 겸 셋집, 11일 오전 서울 전쟁기념관 앞마당에서 했다.

1989년 1월 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3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명예선언문'을 발표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촉구했던 이동균(오른쪽)씨와 김종대(왼쪽)씨<당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2중대장 이동균(30) 대위와 3중대 1소대장 김종대(26) 중위>가 30년이 지난 2018년 7월 11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한겨레 토요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89년 1월 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3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명예선언문'을 발표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촉구했던 이동균(오른쪽)씨와 김종대(왼쪽)씨<당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2중대장 이동균(30) 대위와 3중대 1소대장 김종대(26) 중위>가 30년이 지난 2018년 7월 11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한겨레 토요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의 본분은 국민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군대 내부에서 반애국적, 반국가적 사안이 발생하지 않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기를 든 사람은 언제든지 강도와 폭도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 때 기무사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계엄을 준비한 것은 자기 본분을 넘어서서 스스로 반역사적이고 반국가적 행위를 수행하는 단체로 변해간 것이다. ”

1989년 현역 장교로서 군의 정치중립을 요구하는 명예선언을 했던 이동균(57·금감이앤씨 대표)씨는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이 대목에서는 단호했다. 이씨와 함께 당시 명예선언을 주도했던 김종대(54·한국미래기술원 원장·이하 호칭 생략)씨도 “생양아치나 하는 짓을 군이 했다. 비정상인 게 정상으로 둔갑됐던 거다”며 군의 일탈에 분노를 표했다.

“말로만 복직이지 내용은 깡통”

지난 3월말 이동균은 국방부가 보내온 공문(2018 국방부 인사명령 제271호)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14년 동안의 “검토” 끝에 내놓은 응답은 너무나 허망했다. “1989년 2월 28일의 파면(제적·불명예 제대)은 무효, 전역은 그해 6월 30일“이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복직은 됐지만, 1989년에 전역도 했다는 의미다. 군복을 입는 실질적인 ‘복직’이라는 그의 소망은 물거품이 됐다.

군을 상대로 한 이동균의 싸움은 2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1월 5일 저녁 이동균(대위·30사단 공병대대 2중대장)과 김종대(중위·30사단 공병대대 3중대 1소대장)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KNCC) 사무실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제도적 조처’ 등의 요구를 담은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는 같은 공병대대의 장교들이었던 이청록(1중대 3소대장), 박동석(1중대 2소대장), 권균경(공사장교) 3명도 서명했다. 이들은 다음날 군 검찰에 의해 군형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면서 기소되지는 않았다. 대신 징계위에서 이동균과 김종대는 파면, 나머지 3명은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등병으로 강제 전역 당한 이동균과 김종대 2명은 이듬해인 1990년 군을 상대로 파면 취소 청구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파면 처분은 정당하다”며 국방부 손을 들어줬다.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은 1998년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였다. 김대중 정부 때 제정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군 명예선언에 참석한 5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2000년 11월)됐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12월에는 위 법에 따라 설치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명예회복 조치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국방부에 이들의 복직을 권고했다. 국방부는 이듬해 4월 “병적 확인 및 법률적 검토가 진행 중”이라는 무성의한 답변을 보냈다. 그 이후로는 가타부타 반응조차 없었다.

이동균은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군적폐청산위원회’가 설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는 적폐청산위에 복직을 청원했다. 지난 3월 보내온 국방부 공문은 거기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다. 2004 복직 권고 이후 14년 만에 받아낸 결론이며, 1989년 파면된 때부터 따지면 29년만이다.

복직(1989년 3월2일)은 됐으나, 그해 6월30일 이미 전역했다는 내용으로 이동균씨에게 보내온 국방부 공문
복직(1989년 3월2일)은 됐으나, 그해 6월30일 이미 전역했다는 내용으로 이동균씨에게 보내온 국방부 공문

“공문을 보니 이들이 사람을 두번 죽이는구나는 생각이 들더라. 국민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한 데 대해 파면이라는 처벌로 한번 죽이더니 이번에는 복직을 했다는데 내용은 완전히 깡통으로 만들어서 또 죽였다. 우리 군이 갈 길이 아직 멀구나 싶더라.”(이동균, 이하 이)

“제 서류는 지금 국방부 차관한테 올라가 있다. 저도 같은 결론이 날텐데 이게 말이 되나. 파면이라는 부당한 징계를 무효로 한다면 복직과 복권에 따르는 합당한 조처를 해줘야 정상 아니냐.”(김종대, 이하 김)

국방부의 답변에 대해 이동균은 지난 5월 민원을 제기했다. 군인보수법과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라 파면이 무효된 날(2018.3.28)까지의 보수를 지급해주고, 그동안의 정기 승급을 감안해 최소한 대령으로 예우해달라고 요구했다. 국방부는 지난달 답변서를 통해 “원치않는 전역으로 인해 그동안 겪었을 심적 고통에 대해 다시금 죄송한 마음”이라면서도 전역일에 대해서는 “귀하는 단기복무 장교로서 1989년 6월30일 복무기간이 만료됐다”고 밝혔다.

“명예선언을 통해 저의 자존을 찾았다. 고생은 했지만 그 뒤 행복했다.” 1989년 1월 5일 저녁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3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촉구했던 이동균씨(당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2중대장 대위)가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한국미래기술원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명예선언을 통해 저의 자존을 찾았다. 고생은 했지만 그 뒤 행복했다.” 1989년 1월 5일 저녁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3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촉구했던 이동균씨(당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2중대장 대위)가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한국미래기술원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민주정부에서도 군 간부들 안 변해”

이동균과 김종대는 국방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동균의 경우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본다. 지금까지 복무한 것으로 가정해서 급여를 지급하게 될 경우에 법에 따라 그동안 사회생활에서 벌어들인 수익과 상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오히려 몇억원의 돈을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국방부 태도로 볼 때 소송이 오래 갈 것이기에 이 정도에서 일단락 짓고 생활인으로서 조용히 살고픈 마음도 솔직히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제 개인에게 국한된 게 아니어서 동료들과 상의해서 소송할 생각이 있다. 돈을 내놓을 용의가 충분히 있다. 돈보다 중요한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강도짓이 들통난 강도가 뺏은 것만 주인에게 돌려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지 않나. 충분한 예우와 대우가 이뤄져야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는 것이다. 제가 자리나 돈을 탐해서가 아니다. 그러한 예우 조처가 있어야만 정의로운 행동은 언젠가는 보답 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이)

“우리 사건은 상징적인 게 됐다. 사필귀정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렛대로 삼고 싶다.“(김)

두 사람이 지난한 법정투쟁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은 군이 지금도 바뀐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4년 복직 권고를 했을 때는 노무현 정부였는데도 국방부가 깔아뭉갰다. 상당수 군 간부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별 문제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그들의 간이 더 커진 것이다. 예전의 군사정권처럼 뭘 해도 되네 하면서 군이 정치 댓글작업 등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때 우리의 복직이 이뤄지고 국방부가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면 군인들에게 경종이 돼서 그런 일탈은 못했을 것이다.”(이)

군은 이번에도 29년만에 복직 조처를 취하면서도 당사자에게조차 전화 한 통 없이 공문만 슬그머니 보냈다. 언론 보도자료도 내지 않았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의미있는 일을 했는데도 쉬쉬했다.

“군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두 정권에서 군이 정치 댓글을 달고, 민간인을 사찰했다. 또, 계엄령을 발동해 시민들의 집회를 강제 해산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군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다. 어느 나라나 총을 가진 자에게는 정치 중립을 요구한다. 그러지 않으면 후진국형 쿠데타가 빈발한다. 무기를 든 사람은 자칫 강도와 폭도로 돌변할 수 있기에 그런 반애국적이고 반국가적인 행위를 미리 감지하고 제압하라고 기무사가 있다. 그런데 기무사가 자기 본분을 넘어 스스로 반역사적이고 반국가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단체로 변해갔다. 진실을 규명해서 책임있는 사람은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이)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사찰과 계엄령 기획 등이 잘못된 일이라고 군이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아,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안 하고 있지 않나. 진정한 반성이나 자기 성찰이 없는 거다.”(김)

학군단(ROTC) 출신의 이동균은 1984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대학(경희대 토목과) 전공이 고려돼 30사단(경기도 고양) 공병부대에 배치됐다. 김종대가 “나의 상관 중에서 유일한 참군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명예로운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의 양심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총선이 절정이었다. 당시 군 부재자 투표는 부대 안에서 이뤄졌는데, 선거 몇달 전부터 ‘정신교육’이니 ‘개별면담’이니 하면서 병사들의 성향을 조사하게 하고, 결국 여당에 투표하도록 유도했다. 또, 물을 섞은 풀로 투표용지를 넣은 봉투를 봉하게 했다. 보안부대에서 어떻게 할지 뻔했다.

“병사들의 참정권 행사를 방해하도록 강요받으면서 혼자서 많이 고민했다. 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시위 진압에 우리 부대를 동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80년 광주처럼 군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큰 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면 나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나, 폭탄을 갖고 나가서 터트리기라도 할까 생각할 정도로 절박하게 고민했다. 군 민주화를 촉구하는 방안에 대해 혼자 고심하고 있을 때 같은 부대에 있던 종대가 명예선언이라는 안을 제시했다. 의기투합해 둘이 일을 추진하게 됐다.”(이)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하는 이동균씨와 김종대씨의 모습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1989년 1월 6일) 지면 사진.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하는 이동균씨와 김종대씨의 모습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1989년 1월 6일) 지면 사진.

6월항쟁 군 출동하면 ‘죽음 항거’ 각오

학군단(목원대 건축과) 출신으로 1987년 30사단에 배치받은 김종대 역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랬기에 군의 정치개입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은 당연했다. 6월항쟁 당시 부대에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실은 훈련 상황이었는데 이를 모르고 “군 지휘관들이여, 민중과 같이 하십시요. 그리고 좀 더 긴장하여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하십시요”라는 내용의 유서를 썼다. 시위 진압에 나서게 되면 자폭하겠다고 결심했다. 소대장으로서 병영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그가 1989년 내건 캐치 프레이즈는 ‘민주 1소대를 위하여’였다. (김종대, <군 명예선언>, 1990년, 실천문학사)

“1988년 11월 어느날 저녁 식당에서 동균 형님을 만나서 평소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명예선언을 얘기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야, 그것 줘 봐’라면서 내가 메모한 종이를 보고는 ‘같이 하자’고 했다. 내 초안을 형님이 다듬어서 다시 썼다. 나중에 군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두 명의 머리에서 이런 내용의 선언문이 나올 리 없다. 외부의 배후가 누구냐’고 없는 배후를 추궁해서 정말 힘들었다.”(김)

이들은 그해 12월 12일에 명예선언을 하려고 했다. 정치 군인인 전두환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날(12.12사태)에 명예선언을 함으로써 군의 정치중립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선후배 동료들에게 가급적이면 피해를 덜 주기 위해 ‘거사’ 날짜를 늦췄다. 직속 상관인 대대장 교체가 예정돼 있어 그 후로 잡았다.

“잃어버린 29년에 대한 보상을 받아서 12.12때 참군인의 모습을 보인 김오랑 소령의 동상을 육사에 세우고 싶다.” 1989년 이동균씨와 함께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했던 김종대(당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3중대 1소대장)씨가 지난 10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잃어버린 29년에 대한 보상을 받아서 12.12때 참군인의 모습을 보인 김오랑 소령의 동상을 육사에 세우고 싶다.” 1989년 이동균씨와 함께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했던 김종대(당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3중대 1소대장)씨가 지난 10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과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떤 문제와 비리를 까발리는 양심선언과는 접근을 달리 했다. 군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기에 우리는 현재 상태를 이렇게 개선하자는 식으로 선언 내용을 짰다. 그래야 설득력이 더 있을 거라고 봤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명예선언으로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를 했다. 1980년 광주의 아픔 등을 외면했던 죄가 있으니 한번쯤 내 할 일을 하자는 결심이었다. 사회적 혜택을 받고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자, 또 군을 사랑하는 장교의 한 사람으로서 군을 바꾸는데 앞장서자는 생각이었다.”(이)

김종대도 죽음의 십자가를 질 각오를 했다. “초연하고 담대하게 군부의 인식의 변화를 위해, 조국의 모습과 군의 모습을 하나로 하기 위해 나를 바치기로 했어. 엄마, 아버지 잘 부탁드려”(누나에게 보내는 편지), “과거의 오욕과 불명예로 점철되었던 역사를 바꿔보려고 형다운 나름대로의 결정을 했단다. 슬퍼하지 마라”(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비장한 내용의 편지를 동료에게 남겼다. 그는 명예선언하러 갈 때 가방에 신나를 넣어 갔다.

“명예선언을 하기로 한 날 점심시간에 후배 장교들을 만났는데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이 됐다. 한숨을 쉬니까 왜 그러느냐고 하더라. ‘너희들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고 했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 방으로 가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문건을 보여줬더니 이청록 소위 등 3명이 ‘이런 내용이라면 우리도 같이 하겠다’면서 바로 서명을 하더라. 엄청 고맙고 힘이 됐다.”(김)

전북 익산 출신의 이동균은 고교(남성고) 때나 대학 시절에 학과 공부만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생운동에 가담할 엄두도 못냈다. ‘사람은 어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 당시 출간됐던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혼자서 읽었다. 대학 3학년에 올라가면서 장차 사회 진출에 유리할 수 있는 학사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는 학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면 기업체 특혜 채용이 있었다. 군에서도 자신 만의 독서를 통해 세상에 눈을 떴다.

“식자우환이라고 우리 현실을 알게 되면서 갈등도 더 커졌다. 이전에는 감성적으로만 외면하면 됐는데 이제는 이성적인 것까지 나를 괴롭혔다. 우리 사회를 깊이 알게 되면서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이)

가난한 집안 출신인 김종대는 실업계 고교(대전 동아공고)를 거쳐 목원대로 진학했다. 대학신문 기자로 일했지만,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가 학군단에 지원한 것도 취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평소 정의감이 강했던 그는 군대식 상명하복 위주의 학군단 문화를 민주적으로 고치기 위해 애썼다. 학군단 명예위원장으로 전국 학군사관 후보생 간부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였다. 주최 쪽은 학군단이 학생운동을 막는 일을 해주기를 원했다. 별 두개를 단 장군이 버티고 앉은 단상에 나가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군민주화운동 등 헌신한 이씨
새 세기 맞아 평범한 생활인으로
“명예선언으로 자존 찾아서 행복
‘정의 보답받는다’ 전례 만들터”

테러·대기업서 퇴출 당했던 김씨
육사에 김오랑 동상 추진 등 노력
“역사 물줄기는 소수 희생이 바꿔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할 일 다해야”

1989년 1월5일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한 이동균 대위(오른쪽 소파의 군복 입은 이)와 김종대 중위(왼쪽 소파 군복 입은 이)가 의문사 피해 유가족 및 재야인사들과 얘기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9년 1월5일 ‘군 명예선언문’을 발표한 이동균 대위(오른쪽 소파의 군복 입은 이)와 김종대 중위(왼쪽 소파 군복 입은 이)가 의문사 피해 유가족 및 재야인사들과 얘기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9년 3월 18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전민련 등 9개 재야시민단체가 이동균씨가 참가한 가운데 ‘명예선언 장교 환영대회’를 열고 정치군부 퇴진, 김종대씨에 대한 피습 해명 등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9년 3월 18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전민련 등 9개 재야시민단체가 이동균씨가 참가한 가운데 ‘명예선언 장교 환영대회’를 열고 정치군부 퇴진, 김종대씨에 대한 피습 해명 등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월4일 밤 1차 실패 뒤 긴장의 하루

명예선언은 1월 4일이 D데이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 중대에서 구타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이동균이 외출을 하지 못했다. 김종대 혼자 서울 명동성당에서 함세웅 신부를 만났지만, 함세웅은 “당신들이 이 일로 죽을 수 있는데 종교인으로서 그런 것을 도울 수는 없다”며 기자회견을 주선하는 것을 사절했다. 밤늦게 성당 마당에서 <한겨레> 기자를 만났지만, 이튿날 신문에 보도되기는 늦었다. 그는 빈 손으로 귀대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문에 기사가 나도록 하라고 종대한테 얘기했는데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니 기사가 없더라. 앞이 깜깜했다. 종대가 간 뒤에 밤 늦게 내가 다른 신문사 5곳을 돌면서 명예선언문을 주고 기사화를 부탁한 상태였다. 기밀이 새 나갔을테니 보안사(기무사의 옛이름)에서 우리를 잡으러 오지 않을까 종일 초긴장 상태였다.”(이)

다행히 보안사는 이튿날까지 이런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덕분에 이동균과 김종대는 1월 5일 저녁 명예선언의 ‘거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명예선언문’을 번갈아 낭독할 때 그 곳에서 농성중이던 의문사 피해 유가족이 증인을 섰다. 군인의 등장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던 유가족들은 곧 이들을 따뜻이 감쌌다. 밤늦게 백기완, 계훈제, 장기표 등 재야 원로들을 불러서 병풍으로 세운 것도 이들이었다. 이튿날인 6일 아침 부대로 복귀할 때는 이재오 등이 호위했다. 명예선언 소식이 1면에 실린 <한겨레> 신문을 들고가서 부대원들에게 읽히고 자신들이 왜 그랬는지를 차분히 설명했다. 이어 헌병에게 연행돼 병영을 떠났다. “즉각 구속됐는데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비록 군사법정이지만 오히려 군의 민주화를 당당하게 호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소하지 않더라. 아마 그런 ‘법정투쟁’에 대한 부담에다가 야당과 재야 시민단체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연일 성명서를 내는 등 응원해줬던 덕분인 것 같다. 우리 둘은 이래도 저래도 괜찮았는데 단지 서명만 했던 3명의 동료들이 100일 동안이나 반성문을 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알았지만, 이들 3명의 역할이 컸더라. 동의대 사태(1989년 5월 3일 경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인한 화재로 부산 동의대에서 경찰관 7명이 숨진 사건) 때 정권에서 군대 투입을 고려했다가 포기했는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평범한 장교 3명의 서명이었다고 하더라. ‘군을 동원했다가는 장교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겠구나’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서명한 세사람과 통화했는데 오히려 그때 자기들이 서명만 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더라. 그 3명에게는 지금도 미안하고 고맙다.”(김)

명예선언으로 군대에서 쫓겨난 이동균은 그 뒤 군 민주화 운동 등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해, 윤석양 등을 비롯해 군과 전경 출신으로 양심선언한 이들을 도왔다. 명지대생 강경대 사건(1991년 4월 시위 도중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짐) 때는 범국민대책위에서 활동하다가 6개월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다. 장기수 북송 등 뒷바라지 활동도 열심히 했다.

“1997년 말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또, 곧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는데 나를 돌아보니 아무런 전문성이 없는 허풍선이 신세더라. 내실을 다져야겠다 싶어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전공 공부를 시작했다. 2000년 대학원을 마친 뒤 토목 관련 개인업체에 취업했다. 몇년 뒤 회사 운영을 갑자기 떠맡게 됐는데 경험 부족으로 수억원의 빚을 지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제 나름의 앞가림은 하고 산다.”(이)

김종대는 전역 당한 지 보름 남짓 지난 1989년 3월 16일 저녁 서울 미아4동 약혼녀 집 앞에서 괴한으로부터 흉기로 머리를 맞아 실신하는 테러를 당했다. 이미 대기업에 채용된 상태에서 입대했던 김종대는 군대에서 쫓겨난 뒤에는 ‘니가 너무 부담된다’는 회사 간부들의 압력에 결국 사표를 냈다. 예닐곱 군데 기업에 지원서를 내봤지만 연거푸 떨어졌다. 그 뒤 인쇄업과 셋탑박스 제작 등 여러 사업과 직장을 전전했다. 지금은 한국미래기술원이라는 개인 연구소를 만들어 초절전 엘이디(LED) 등 기술 개발을 하고 있다.

“솔직히 저는 국방부가 제 인생을 망친 데 대한 보상금이라도 제대로 받고 싶다. 그 돈으로 할 게 많다. 12.12 쿠데타에 맞서 싸우다 숨진 김오랑 소령의 동상을 육사에 세우는데 보태려고 한다. 또, 지금까지 한번도 주지 못한 생활비와 아이들 용돈도 주고 싶다. 며칠 전에는 고등학생 막내가 전화를 해서 자기 혼자만 아직 동복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김)

“촛불보면서 감동…이제 젊은 세대가 주인”

29년 전 목숨을 걸고 했던 명예선언은 이들에게 지금 뭘까.

“당시는 큰 일을 한다고 했는데 돌아보면 세상사에 물 한방울을 탄 것이다. 물론 한방울 한방울이 모여서 맑은 물을 만들 수 있다. 그때 군에 남았던 친구들이 ‘너 때문에 선거 때 부담이 없어졌다.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 응원이 내 삶에 힘이 되더라. 남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명예선언을 통해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 전에는 존재감이 없어 내가 검불같다고 느꼈는데 그 상황을 돌파한 뒤에는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 자존을 찾았다. 그래서 굉장히 편해졌고, 제 스스로 행복했다.”(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은 늘 몇사람의 자기 희생이다. 그때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데 대해 뿌듯하게 생각한다. 살아보니까 사람이 자기가 서 있는 현장에서 할 바를 다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김)

사진 촬영을 위해 11일 오전 서울 전쟁기념관 앞뜰에서 두 사람을 다시 만났다. 전쟁기념관을 견학하러 온 중·고생들이 발랄하게 지나갔다. 이동균이 말을 꺼냈다. “지난번 촛불집회를 보면서 감동했다. 87년을 겪으면서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촛불을 보면서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주인이구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 자신도 아마 깨달았을 것이다. 이제 저들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게 우리 기성세대가 할 일이구나는 생각이 든다.” 김종대도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저들이 우리의 미래”라고 맞장구쳤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이내 묻혔지만,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흘렀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1990년 10월 5일 국군보안사(기무사의 옛이름) 요원인 윤석양씨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보안사의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고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10월 5일 국군보안사(기무사의 옛이름) 요원인 윤석양씨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보안사의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고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윤석양·이지문, 불법활동 폭로로 군 민주화 앞당겨
잇따른 군 양심선언

이동균 대위와 김종대 중위 등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소속 장교 5명의 ‘군 명예선언’(1989년 1월 5일)은 이후 군의 민주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년 뒤 이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국군 보안사령부 요원으로 근무하던 윤석양(52)씨였다. 당시 29살의 윤씨는 1990년 9월 보안사가 그동안 불법적으로 해온 민간인 사찰 기록을 대거 들고 나온 뒤 그해 10월 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이를 폭로했다.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 정치인을 비롯해 주요 민간인 1303명이 보안사의 사찰을 받고 있던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국방부장관(이상훈)과 보안사령관(조남풍)이 경질되고, 보안사령부는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윤씨는 2년간의 옥살이를 한 뒤 복학(한국외국어대 노문학과)해 학교를 마쳤다. 졸업 후에는 경기도 안산에서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장애인 관련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 윤씨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 과거의 특정 이미지로 제가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인터뷰를 사절했다.

윤씨가 수배 중이던 1992년 3월에는 육군 현역 중위인 이지문(50)씨가 뒤를 이었다. 육군 제9사단(백마부대)에 근무중이던 이씨는 14대 총선을 며칠 앞둔 3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군이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의 전신) 후보를 찍으라고 광범위하게 개입한 사실을 고발했다. 이를 계기로 부대 안에서 실시하던 군 부재자투표 장소가 영외로 바뀌었다. 이씨는 근무지 이탈을 이유로 이등병으로 파면됐으나, 법정 투쟁 끝에 1995년 파면은 부당하는 판결을 얻어냈다. 이씨는 이후 최연소 서울시의원, 공익제보자와 함께 하는 모임 등에서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2011년 연세대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고양을 위한 추첨제 도입 방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현재 연세대 연구교수로 있다.

이씨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최근 드러난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과 댓글 활동 등은 윤석양씨의 양심선언 이후에도 군 정보기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군의 정치중립을 규정한 법이 지켜지도록 하려면 내부 고발이나 부당한 지시에 대한 거부가 활성화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내부 고발자들을 군이 아니라 다른 공공기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신분 보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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