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민족 평화포럼을 마친 민주평통과 북쪽 대표들이 25일 오전 중국 선양의 한 호텔에서 좌담회를 열고 있다. 왼쪽 뒷모습부터 사회를 맡은 김종구 <한겨레> 편집인, 황인성 민주평통 사무처장,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림룡철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 정기풍 조선통일연구원 실장.
“이번 같은 포럼을 서울이나 평양에서 이어갔으면 합니다. 먼저 평양에서 열자고 제안했더니 적극적으로 검토하시겠다고 했는데 성사된 것으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돌아가면 10·4선언 등 주요 계기 때 이런 모임을 갖자는 제안에 대해 협의를 하겠습니다. 이번에 직접 만나봤으니 설명을 잘하겠습니다. 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2~24일 중국 선양에서 열린 ‘범민족 평화포럼’을 주최한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과 북쪽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 림룡철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의 좌담은 다음 포럼을 평양에서 열자는 ‘약속’으로 시작했다. 김 부의장이 “제3국에서 할 필요가 있느냐?”며 제안을 상기시키자 림 부회장이 “서로 신뢰를 쌓지 않았느냐”며 즉석에서 화답했다.
김종구 <한겨레> 편집인의 사회로 진행된 좌담은 25일 오전 선양의 한 호텔에서 1시간 남짓 이어졌다. 포럼에 대한 소감과 평가에서 시작해 판문점선언 이행 방안, 종전선언이 이뤄지기 위한 조건, 국제 제재와 남북 협력의 선후관계 등을 놓고 솔직한 대화가 오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놓고는 잠시 무거운 분위기에 싸이기도 했다. 림 부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얘기하고 싶은 것을 다했다”였다. 이날 좌담에는 황인성 민주평통 사무처장과 정기풍 조국통일연구원 실장이 배석했다.
사회: 매우 시의적절한 시점에 남북이 함께 하는 포럼이 열린 것 같다. 이번 포럼을 진행하면서 느낀 소감을 먼저 듣고 싶다. 또 포럼의 성과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김덕룡(이하 김): 남측 정부기구가 주최하는 행사에 북측 대표단이 참석한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판문점선언 이후 첫 남북 정부간 공식적인 포럼이라고 자평한다. 포럼을 준비할 땐 북측이 올까 확신할 수 없었다. 거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흔쾌히 와줬다. 대표단 구성도 만족스럽다. 예상에 없던 성과를 이뤘다.
림룡철(이하 림): 굉장히 특별한 회합이었다. 북과 남 뿐만 아니라 해외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판문점선언 이행 방안을 모색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사상과 종교는 달라도 판문점선언 이행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얘기할 수 있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보게 된 것 자체가 큰 성과이다.
사회: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금단의 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판문점선언에 대한 북쪽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이 궁금하다.
림: 판문점은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도 차디찬 총구들이 마주친 곳이었다. 판문점선언은 격정의 순간이었다. 북남 두 수뇌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두가 기뻐했다. 북남관계의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어 5·26 수뇌상봉이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열렸다. 북남 수뇌부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오가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걸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줬다. 인민들에게 긍지를 갖게 했다.
사회: 판문점선언 이후 110여일이 지났다. 그동안 남과 북에서 펼쳐진 새로운 정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김: 남에는 보수가 있고, 진보와 중도도 있다. 통일정책이나 대북정책에 의견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경제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데는 거의 차이가 없다. 통일은 먼저 정서공동체를 만들고, 경제공동체로 발전하고, 최종적으로 정치공동체로 올라가는 과정이다. 전쟁만은 하지 말자는 데 어느 누구도 거부감이 없다. 다만 속도나 북의 반응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남측의 다수는 판문점선언 이후 정세를 환영한다고 본다. 일부 소수만이 냉전시대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림: 우리 민족의 위상이 올라갔다. 얼마든지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10여일 동안 한 일도 많다. 군사회담 재개, 이산가족 상봉, 체육·문화예술 교류가 점진적으로 이룩됐다. 판문점선언의 결과는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이뤄낸 것들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입장에 서면 속도에서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막식 현장에서 봤다. 남북단일팀이 입장하자 아시아인들이 하나되어 찬사를 보내더라. 반도의 문제는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역,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걸 느꼈다. 우리는 지금 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사회: 포럼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다. 종전선언을 올해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종전선언을 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림: 종전선언은 북남 수뇌상봉과 조-미 싱가포르 선언에서 합의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조선반도 평화를 바라왔다. 약속한 것은 꼭 해내야 한다. 어기면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이라든가 이행 방도는 전문일꾼들이 하면 된다. 수뇌부들이 합의한 것이니 이행해야 한다.
김: 종전선언은 법적인 문제라기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빨리 이뤄지길 희망한다. 종전선언에는 전쟁을 했던 국가들이 참여해야 한다. 미국의 의사에 반해 종전선언을 할 수는 없다. 북-미간에 빨리 합의점을 찾길 바란다. 남에서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타이밍, 시간 관리가 중요하다. 미국에서 온 패널이 말한 것처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11월 중간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타이밍을 잘 생각하면서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되는 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무게를 두고 판단해야 한다.
황인성(이하 황): 판문점선언 이행과 관련해 중요한 것이 북-미관계 정상화와 국제적 제재 문제이다.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선 종전선언이 굉장히 중요하다. 종전선언이 빨리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림: 종전선언은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미국에 무엇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이것을 외면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신의를 지켜야 한다. 미국이 리비아나 이라크와의 관계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수뇌 쌍방이 약속한 것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사회: 림 부회장은 판문점선언 이행은 평화와 번영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로 굴러가는 마차인데, 번영의 바퀴가 멈춰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남북 경제협력이 늦어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김: 현실적으로 제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같이 하기가 쉽지 않다. 남측이 신북방, 신남방정책 같은 구상을 갖고 있음에도 집행하기 어려운 것은 제재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경제가 잘 되려면 국제적 협력과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국제적 협력이 바로 제재 문제와 연결돼 있다. 이것이 잘 해결돼야 경제협력의 구체적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북-미가 빨리 비핵화와 관련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접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어제만 해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에 기대를 걸었는데 하룻만에 취소됐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도 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림: 제재 문제에 북남이 귀속되지 말아야 한다. 경제협력은 비핵화의 종속변수가 아니다. 비핵화는 자기 일정대로 가고, 북남관계도 자기 일정대로 가야 한다. 동포 경제인들이 평양에 가고 싶어 하고, 남측 경제인들도 평양에 가고 싶어 한다. 이것이 북남의 민심이다. 우리가 주동적으로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잘 사는 문제는 주권의 문제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못할 게 없다. 그래서 시종일관 판문점선언을 이행하자고 일관되게 얘기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협력하자.
김: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분단부터 남북이 만든 것이 아니다. 남북의 합의만으로 통일이 되지 않는다. 남북문제를 푸는 데 국제적 협력이 중요하다. 북-미합의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남북관계 진전이 북-미관계를 진전시키는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 남북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 남북이 협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정확히 봐야 한다.
사회: 이번 포럼을 지켜보니 남북 협력의 문제에서 남쪽과 해외에서 온 분들은 국제협력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반면, 북쪽은 민족공조에 주로 방점을 찍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림: 우리는 조-미회담 이후 적지 않은 성의를 보였다. 합의에 따라 선제적 조처를 취했다. 그럼에도 진척이 안 되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 경제인들이 평양에 갈거냐 말거냐를 저울질하고 있어야 하겠는가. 미국은 신의를 지키고, 우리는 우리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김: 종전선언은 판문점선언에서도 말했지만 합의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미국이 안 하겠다면 못하는 것이다. 왜 미국이 종전선언을 늦추고 있는가는 북측이 잘 알리라고 본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할 수 있도록 합의점을 만들어야 한다. 북-미 싱가포르 성명에서도 ‘판문점선언을 확인하고’ 라는 문구가 있다. 미국도 판문점선언을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합의 없이는 종전선언은 불가능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측의 성의가 부족하다고 보는 듯한데, 북측이 해결하면 좋지 않은가.
림: 판문점선언 속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가 있다. 이것을 이행하겠다는데 미국이 따져보겠다고 한다. 이것은 방해이다. 미국이 판문점선언을 존중한다면 남북연락사무소가 운영되도록 도와줘야 한다.
김: 남북연락사무소를 제재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미국 일각의 의견이다. 미국의 공식 입장이 연락사무소 설치는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제재와 관련 없다고 남측 정부도 확인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가 전략적 인내라며 남북문제를 팽개쳤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절호의 기회이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도 고려하길 바란다.
좌담을 마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과 림룡철 민화협 부회장이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사회: 이번 포럼에 해외 동포와 전문가들이 많이 참석했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해외동포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김: 이번에 7개 나라에서 동포와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들이 참석한 게 금상첨화였다. 남북과 해외동포가 제대로 네트워킹을 이뤄야 우리 민족이 세계 중심에 설 수 있다. 민주평통에는 122개국에서 3600여명의 자문위원이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 살다보니 조국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분단현실에 가슴 아파 한다. 통일을 절실히 바란다. 이들의 역량을 결집하는 게 중요하다
정기풍: 해외동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한겨레>가 특히 강조해줬으면 좋겠다. 포럼에서 해외동포들이 ‘경계인’이라는 말을 쓰던데, 전에는 몰랐던 말이었다. 해외동포는 민족의 한 부분으로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이다. 피도 같은 맥박으로 뛰고, 넋도 같은 지향으로 흘러가는 우리 민족의 성원이다. 해외동포들이 자신을 이방인이나 파편, 교량자가 아닌 당당한 주체라는 의식을 갖는 게 중요하다. 다섯 손가락이 뭉치면 주먹이 되는 것처럼 해외동포들이 같은 목소리로 판문점선언을 지지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현지 동포사회에서 종전선언 채택 문제가 미국 시민들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얘기하면 평양이나 서울에서 하는 것보다 말발이 서지 않겠는가.
황: 이번 포럼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깊어졌다. 우리가 가는 길에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잡은 손을 다시는 놓지 말자는 말을 새긴다. 그런 의지가 크고작은 어려움을 감당하고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마지막으로 이번 포럼에서 남과 북을 대표했던 두 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오늘 좌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김: 이번에 북측 대표단을 만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북측 인사들이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니 아주 오픈된 태도로 남의 의견을 경청하더라. 남측 사정도 소상히 알고, 패션 정보도 갖고 있어 놀랐다. 선입견에 빠져 있었던 것을 반성했다.
림: 김정은 국무위원장께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편견과 관행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우리 역시 이번에 편견과 관행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민족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우리 민족을 보자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선양/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