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평화한반도 문화인 회의 유시춘 공동대표
“평양 광장에서는 한국 영화 <투캅스>를 틀고 남한에선 북한에 있다는 나운규 영화 <아리랑> 원본 필름으로 순회 상영회를 할 날을 꿈꿉니다.”
지난 11일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창립식을 한 ‘평화한반도 문화인회의’(이하 문화인회의·상임대표 정현숙 한국 여성탁구연맹 회장) 유시춘 공동대표의 말이다. 배우 안성기, 연극인 손숙, 가수 김수철, 시인 정희성, 서명숙 제주올레 대표 등 문화·체육계 인사 200여 명이 참여한 이 단체는 민간 차원에서 남북 문화 교류의 허브가 되겠다는 뜻으로 설립됐다. 단체 이름도 직접 짓고 결성을 이끈 유시춘 대표를 23일 오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교육방송> 이사장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달 17일부터 임기 3년의 <교육방송>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창립 경위는? “4·27 정상회담 한 달 전인 지난 3월 김포 사는 홍선웅 판화가 집으로 매화 구경을 갔어요. 그때 북한 그림이 화제에 올라 ‘남·북이 대립하는 지금 상황이 오래 갈 수는 없다, 큰 변화가 올 것이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때를 대비해 남·북의 문화 체육인들이 부문별로 각개 약진하지 말고 통일적 교섭을 할 수 있는 단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눴어요. 남과 북은 5천 년 문화 공동체잖아요. 정치나 군사 쪽은 협상이 더디겠지만 문화는 미국의 간섭 없이 우리끼리 주고받을 수 있어요.” 그 뒤 한반도에 기류변화가 오면서 그의 구상이 탄력을 받았다. “4월 이후 두 차례 워크숍을 했어요. 5월부터 문학 미술 체육 관광 대중가요 등의 각 분야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한 분들이 참여하셨어요.” 문화부 차관을 지낸 박양우, 조현재씨와 이준동 영진위 부위원장, 윤광식 도종환 문화부 장관 정책보좌관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최근 ‘10·4 남북공동선언 11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유 대표는 내달 3~4일엔 금강산을 찾는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화 민화협) 공동의장 자격으로 10년 만에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 민화협 공동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북쪽 인사들을 만나 민간 차원의 문화 교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류를 위한 상설협의체도 세워 달라고 요청할 참이다. “교육방송 간판 프로그램인 <세계테마기행> 북한 편 기획안도 전달하려고요. 세계테마기행이 지금껏 북한만 빼고 세계를 다 갔어요.”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북 유소년 대상으로 차범근 축구 교실을 열 수 있겠죠. 지뢰를 제거한 디엠제트에서 남한 시인들은 북이 고향인 백석의 시를 낭송하고 북 시인들은 남한의 정희성·도종환 시인의 시를 낭송할 수 있겠죠.” 그는 “너무 다른 체제에서 70년간 살아와 정치적 통일은 쉽지 않지만 문화 교류는 다를 것”이란 생각이다. “남북 모두 비슷한 디엔에이에 빼어난 문화 역량이 있어요. 국제정치적 갈등에 영향받을 일도 없어 서로 합의하면 가능해요.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고 또 영화처럼 친근한 장르부터 먼저 교류할 생각입니다.” 개인 생각이라면서 이런 말도 했다. “외세가 만든 분단으로 지난 70년 찢기고 무너진 삶을 산 분들을 위해 국가 차원의 진혼제를 디엠제트에서 하면 좋겠어요. 종교계 주도로요. 그게 산자의 예의이죠.”
그는 지난 1일 동생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 오면서 이 재단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특수관계자가 이사장이 됐잖아요. 또 재단이 정파적 성격이 있어 교육방송 이사장을 하는 동안은 물러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민간 남북 문화교류 허브 꿈꾸며
11일 창립…안성기 등 200명 참여
“영화 같은 친근한 장르부터 시작
내달 민화협 남북 행사서 교류 타진” 지난달 임기 3년 EBS 이사장 취임
“언젠가 80년대 다룬 ‘가계소설’ 낼 터
아들·딸 차별하지 않은 부친께
고맙단 말 한 번도 못해 한스러워” ‘나는 예순이 넘은 지금도 자유, 정의, 인권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일렁인다.’ 그가 4년 전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쓴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지난 삶이 이 독백의 증표일 것이다. 85년 구속학생학부모회 초대 총무, 86년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 초대 총무, 87년 민주쟁취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85년엔 ‘빨갱이 교사’란 말을 들으며, 15년 동안 국어를 가르친 서울 장훈고에서 해직 당했다. 고려대 국문학과 68학번인 그는 1973년 단편 <건조지대>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안개너머 청진항> 등 소설집을 모두 6권 냈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 80년대를 다룬 5천매 분량의 ‘가계 소설’을 펴낼 생각이다. 이미 500매 정도는 써두었단다. “제가 80년대는 가장 잘 알거든요.” 그는 4녀 2남 중 맏이다. 여섯 중 넷이 민주화 투사였고, 셋이 작가다. 둘째 동생 시정은 전교조 창립 때 해직을 당했고, 넷째 시민과 막내 시주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했다. 다른 두 동생은 “얌전하게” 살고 있단다. 그가 84년 거리의 쌈꾼이 된 것도 넷째가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게 발단이었다. 현재 시민단체 희망제작소 이사인 막내도 스테디셀러인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여러 책을 썼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아들이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한 것보다 작가가 된 걸 자랑스러워 할 겁니다.” 범상치 않은 남매들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를 먼저 떠올렸다. “딸은 자식 취급도 안 하던 시절에 아들보다 더 귀하게 예뻐해 주셨죠. 제가 경주여중 3학년 때 기말고사 기간에 집에서 설거지하고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 눈치를 보며 저에게 ‘들어가서 공부해라. 설거지는 내가 할게’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직접 설거지도 하고 밥도 지어 딸 도시락도 싸주셨어요. 이런 아버지를 두고 주변에서 쑥덕거리면 ‘여자는 남자보다 물리적으로 약하지 않으냐.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돕는 게 순리’라고 하셨죠. 휴머니스트이셨어요.” 아버지는 어려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평생 독서광이었단다. “두 살 때 홍역을 앓다 왼쪽 눈 시력을 잃으셨어요. 이 때문에 위로 두 분 형님들만 공부를 시켰고 아버지는 농사일을 시켰다고 해요. 그런데도 늘 안약을 넣으면서 책을 읽으셨어요. 제가 평생 가슴 아픈 일은 그런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못한 일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늘 한발 늦게 찾아와요. 인간은 이 운명적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요.”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8명이 빙 둘러앉아 꽁치 한 마리씩 놓고 밥을 먹으면 아버지가 이순신 을지문덕 강감찬 같은 민족 위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경제학을 전공한 시민이 역사로 밥 벌어 먹고사는 것도 다 아버지 덕이죠. 아버지 삶의 기쁨은 오로지 독서이셨죠. 술 담배도 안 하셨어요. 자식들에게 책을 읽히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어요. 딸들은 온순해서 다 읽고 독후감을 썼어요. 근데 시민은 책을 안 읽고 축구만 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독후감을 쓰면 10원씩 주셨어요. 그게 유시민 최초의 인세이죠. 하하.” 아버지는 만 61세 되던 82년 강제징집을 당해 군에 있던 아들 시민에게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을 가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편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결혼한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독후감이 담긴 편지를 보내오셨어요. <서구의 몰락>이나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편력> 등에 대해 쓰셨죠. 아버지는 열 살 어린 어머니도 제자처럼 여기셨어요. 소설책을 엄마에게 읽으라고 갖다 주셨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읽고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셨죠. 어머니 구변이 참 좋아요. 시민이 말을 잘하는 것은 모친을 닮았어요.”
고행의 가시밭길을 가는 자식을 보면서 모친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큰 반대를 하지 않으셨어요. 89년 전교조 창립 때도 이미 의식화가 돼 동생(시정)에게 전교조를 탈퇴하라는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 오히려 동생 시댁에서 ‘왜 그 좋은 자리(교사)를 그만두려고 하나’란 이야기가 들리자 사위를 불러 ‘내 딸이 뭘 잘못했다고 언짢게 생각하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딸이 번 돈 다 보내라’고 하셨죠.” 맏이인 그도 동생들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단다. “막내 시주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교사로 임용된 뒤 6개월 만에 그만두고 구로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겠다고 해요. 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너희들이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만류했어요. 몸을 다칠까 걱정이 많이 되었죠. 제 말에 동생이 ‘안 바뀌는 것 안다. 그래도 꼭 해야 하는 일이라서 하려고 한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못했어요.”
남매들이 혹 정치적 견해차로 갈등을 빚은 적은 없는지 물었다. “97년 대선 때 ‘비판적 지지’를 한 이후로 선거 때나 정치적 의사 결정에서 남매들 의견이 거의 똑같았어요. 정치적 견해차로 싸울 일이 없어요. 우리 남매는 너무 친해요. 엄마 친구들이 우리 형제 우애가 깊다는 걸 가장 부러워하죠.” 이런 말도 했다. “시민이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 그 집 딸이 학교에서 베스트드레서로 뽑혔다고 해요. 제가 한국에서 조카 입으라고 이쁜 옷을 많이 보내줬거든요.” 2세 가운데 작가를 꿈꾸는 이가 있는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있는 시주 아들이 작가가 되고 싶데요.”
그는 60대란 나이가 무색하게 씩씩하고 활기가 넘쳤다. 걸음걸이도 젊은이 못지 않게 빨랐다. 기자가 ‘아버지와 관계 형성을 잘한 딸들이 사회생활을 잘한다더라’고 하자 맞장구를 쳤다. “미국 학자들이 정립한 ‘아버지의 딸’(FATHER’S DAUGHTER)이란 개념이죠. 아버지의 신뢰와 애정을 받고 자란 딸들이 사회에서 거침 없이 잘해나간다는 것이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유시춘 평화한반도 문화인 회의 공동대표.
11일 창립…안성기 등 200명 참여
“영화 같은 친근한 장르부터 시작
내달 민화협 남북 행사서 교류 타진” 지난달 임기 3년 EBS 이사장 취임
“언젠가 80년대 다룬 ‘가계소설’ 낼 터
아들·딸 차별하지 않은 부친께
고맙단 말 한 번도 못해 한스러워” ‘나는 예순이 넘은 지금도 자유, 정의, 인권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일렁인다.’ 그가 4년 전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쓴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지난 삶이 이 독백의 증표일 것이다. 85년 구속학생학부모회 초대 총무, 86년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 초대 총무, 87년 민주쟁취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85년엔 ‘빨갱이 교사’란 말을 들으며, 15년 동안 국어를 가르친 서울 장훈고에서 해직 당했다. 고려대 국문학과 68학번인 그는 1973년 단편 <건조지대>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안개너머 청진항> 등 소설집을 모두 6권 냈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 80년대를 다룬 5천매 분량의 ‘가계 소설’을 펴낼 생각이다. 이미 500매 정도는 써두었단다. “제가 80년대는 가장 잘 알거든요.” 그는 4녀 2남 중 맏이다. 여섯 중 넷이 민주화 투사였고, 셋이 작가다. 둘째 동생 시정은 전교조 창립 때 해직을 당했고, 넷째 시민과 막내 시주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했다. 다른 두 동생은 “얌전하게” 살고 있단다. 그가 84년 거리의 쌈꾼이 된 것도 넷째가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게 발단이었다. 현재 시민단체 희망제작소 이사인 막내도 스테디셀러인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여러 책을 썼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아들이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한 것보다 작가가 된 걸 자랑스러워 할 겁니다.” 범상치 않은 남매들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를 먼저 떠올렸다. “딸은 자식 취급도 안 하던 시절에 아들보다 더 귀하게 예뻐해 주셨죠. 제가 경주여중 3학년 때 기말고사 기간에 집에서 설거지하고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 눈치를 보며 저에게 ‘들어가서 공부해라. 설거지는 내가 할게’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직접 설거지도 하고 밥도 지어 딸 도시락도 싸주셨어요. 이런 아버지를 두고 주변에서 쑥덕거리면 ‘여자는 남자보다 물리적으로 약하지 않으냐.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돕는 게 순리’라고 하셨죠. 휴머니스트이셨어요.” 아버지는 어려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평생 독서광이었단다. “두 살 때 홍역을 앓다 왼쪽 눈 시력을 잃으셨어요. 이 때문에 위로 두 분 형님들만 공부를 시켰고 아버지는 농사일을 시켰다고 해요. 그런데도 늘 안약을 넣으면서 책을 읽으셨어요. 제가 평생 가슴 아픈 일은 그런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못한 일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늘 한발 늦게 찾아와요. 인간은 이 운명적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요.”
유 대표에게 언제부터 작가를 꿈꿨냐고 물었다. “경주여중 3학년 때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신라문화제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죠. 그 뒤로 작가를 꿈꿨죠.”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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