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인 2019년 새해 첫 달의 독립운동가에 유관순 열사가 선정됐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를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한국 정부는 1962년 유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입학했고 3·1운동이 있기 하루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모인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는 시위 결사대 동지 5명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최대 시위인 ‘남대문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학교가 결국 문을 닫자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며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유 열사는 3월13일 사촌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했다. 4월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시위 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볐다. 그러자 병천 주재소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다.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했다.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유 열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저녁 유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됐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유 열사는 천안 헌병대와 서대문 감옥 등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지하 감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기도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8살이었다.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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