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이채로운 설맞이 축하무대가 펼쳐졌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신년사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강한 의지와 함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을 제안했다. 남쪽에 대해선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결과물들을 “사실상의 불가침선언”으로 의미를 부여한 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허용하지 말라며 구체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국들이 참여하는 평화협상과 남북이 주도하는 군사적 긴장 완화를 통해 체제안전을 담보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의 다자협상 언급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와 군사적 긴장 완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에 들어 있다. 북-미 비핵화 협상과 관련한 대목보다 앞서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비핵화 협상의 결과물로 보는 미국의 시각과는 결이 다소 다르다. 비핵화와 함께 평화체제 구축, 남북관계 진전을 동시에 선순환적으로 끌고 가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다자협상 제안은 남북이 4·27 판문점선언에서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힌 것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해 종전선언 추진을 지나치게 부각한 것이 북-미 비핵화 협상에 되레 걸림돌로 작용한 점을 고려해 이를 포괄하는 평화협상으로 나아가자는 제안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다자협상의 주체를 “정전협정 당사자”들이라고 명시했다. 평화협상 전체 과정에서 중국의 참여를 전제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정세 변화에 건설적 역할을 다짐하는 중국을 배려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고위당국자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해 3자, 또는 4자란 말이 나오니까 다자협상이라는 말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남쪽의 책임 있는 역할을 주문했다. 특히 “외세와의 합동(연합) 군사연습을 더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미는 지난해 을지프리덤가디언, 비질런트 에이스 등 연합훈련을 유예했고, 전략자산의 반입도 자제했다. 올해 상반기 예정된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인 독수리훈련의 규모도 축소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전략자산 반입 금지를 요구한 것은, 미국이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연합훈련을 재개하지 못하도록 남쪽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를 안전판으로 설정한 셈이어서 문재인 정부로선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런 요구를 ‘주장’이라고 마무리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전제조건’이나 ‘마지노선’으로 삼지는 않았다.
김 위원장은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군사분야 합의서는 북남 사이의 무력에 의한 동족상쟁을 종식시킬 것을 확약한 사실상의 불가침선언”이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이 남북의 군사합의를 한반도에서 우발적 전쟁 위험을 막는 불가역적인 조처로 받아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북과 남은 이미 합의한 대로 대치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를 지상과 공중, 해상을 비롯한 조선반도 전역에로 이어놓기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적극 취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이뤄진 군사적 신뢰 구축 조처를 서해 평화지대 설정 등으로 확대하고, 실질적인 군비 통제 단계로 나아가자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유강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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