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국가보훈처 위법·부당행위 재발방지위원회가 5개월 동안의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보훈처가 민주화운동을 종북·친북으로 매도하는 국가정보원의 ‘호국보훈 교육자료’ 디브이디(DVD)를 나라사랑교육에 적극 활용했으며, 이를 회수·폐기하는 과정에서도 위법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당시 박승춘 처장은 나라사랑교육 강사진에 보수단체 출신들을 선발 절차 없이 대거 추가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보훈처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위원장 지은희) 산하 ‘위법·부당행위 재발방지위원회’는 8일 이런 내용의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지난해 8월13일 출범한 위원회는 10월11일 중간보고를 통해 보훈처가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방해하고, 사회주의계열 인사가 포함됐다는 이유로 몽양기념사업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처장은 2011년 12월 국정원 심리전단으로부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난하고, 민주화운동을 종북·친북으로 매도하는 ‘호국보훈 교육자료’ 디브이디 1000세트를 넘겨받아 나라사랑교육에 활용했으나, 2017년 말까지 국회 국정감사 및 감사원 감사, 보훈처 자체 감사에서 허위진술로 일관했다. 그러나 나라사랑교육과 직원들이 당시 국정원 정보관한테서 디브이디 샘플을 전달받아 내용을 확인했고, 20장 분량의 배포처 목록을 건네줬으며, 2012년 4월에는 전국 초·중·고교에 공문을 보내 표준 강의 사례에 디브이디에 포함된 제목 4개를 명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훈처는 문제의 디브이디 882개를 2013년 6월까지 회수·폐기했다고 주장했으나 공문상 회수된 디브이디는 129개에 불과했다. 디브이디를 폐기하는 과정에서도 기록관리관을 통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나라사랑교육과 직원들이 청사 안에서 가위로 자르거나 화장장에서 소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디브이디가 실제로 모두 폐기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고 위원회는 지적했다.
박 처장이 주도한 나라사랑교육은 6년 동안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공산화 공포를 조장하여 대북 안보를 강조하고 진보정권을 친북으로 규정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고 위원회는 지적했다. 위원회는 “박 처장은 2011년 3월 이미 교수, 교사 등으로 선발된 100명의 전문강사진이 있음에도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 성우회, 자유총연맹 등 5개의 편향적인 민간단체 출신 강사 322명을 별도 선발절차 없이 강사진에 추가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박 처장은 지방청별로 나라사랑교육 횟수를 매주, 매월 보고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 결과 강의 횟수는 매년 증가(2012년 2664회→2013년 2121회→2014년 2420회→2015년 3792회→2016년 1만727회)했다. 민간강사의 강의 횟수는 2012년의 경우 2134회로 전문강사진의 367회보다 6배 가까이 많았다. 2013년도부터 민간강사의 강의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나 이는 박 처장의 지시에 따라 민간강사들이 전문강사진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라고 위원회는 밝혔다.
보훈처는 2012년 4월 강사진 워크숍에 국정원의 여론조작 민간조직인 ‘알파팀’의 리더 김아무개씨를 부르고, 설명용 책자 <한반도의 빛과 어둠>을 만든 대가로 750만원을 지급했다. “이 책자에는 민주당 정권과 시민·사회단체에 침투한 종북·친북 세력이 북한에 유리한 정책과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것처럼 기술돼 있어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 충분히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고 위원회는 지적했다. 대선이 끝난 뒤 박 처장은 2013년 1월 국제외교안보포럼에서 “작년 1년 동안 성과가 지대했다... 보훈처가...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업무를 추진했다”고 발언했다.
한편, 박 처장은 지난해 7월 서울북부보훈지청에 고엽제 후유증에 따른 보훈대상자로 인정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1971년 전방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고엽제 살포로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보훈심사위원회는 11월12일 상이등급으로 심의·의결했으나, 전직 보훈공무원에 대해선 외부 인사를 중심으로 심사위원회를 꾸려야 한다는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보류됐다.
유강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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