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 끝난 날 밤
하루종일 두문불출하던 북 대표단
각국 기자 일부 호텔로 들여보내
트럼프 대통령 기자회견 반박
기자회견은 12분 만에 마무리
.
한밤중에 북한이 전 세계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취재진의 질문을 받은 뒤 답도 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번째 정상회담을 한 28일을 막 넘긴 시각이었다.
■ 표정 어두운 리용호·최선희 멜리아 호텔서 한밤중 기자회견
1일 새벽 12시15분(현지시각)께,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김 위원장의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 1층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우리로치면 외교장관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북-미 회담 의제 관련 실무 협상에 관여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도 함께 따라 들어왔다.
북쪽 대표단은 28일 오후 1시30분께 회담을 마친 김 위원장과 숙소로 돌아간 뒤 12시간 가까이 두문불출했다. 숙소엔 적막감만 흘렀다. 기자회견이 더 갑작스러운 이유였다.
리 외무상은 회견장 앞에 마련된 탁자 가운데 자리에 앉았고, 최 부상이 그 오른쪽에 자리했다. “제2차 조-미 수뇌상봉 회담 결과에 대한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리 외무상은 왼쪽 가슴에서 고이 접은 두 장짜리 입장문을 꺼냈다. 바로 읽어 내려갔다.
리 외무상이 한 문장을 말하고 나면, 왼쪽에 서 있는 남성이 영어로 통역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표정은 어두웠다. 최 부상은 리 외무상이 입장문을 읽는 동안 입을 꾹 다문채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입장문의 주요 내용은 앞선 28일 오후 2시30분(현지시각)께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2차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반박이었다. 리 외무상과 최 부상의 말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 시설을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최선희 부상)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상응조처로 미국이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민생분야 제재 5건의 일부 항목을 부분적으로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변 핵 시설 폐기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합의문 도출이 무산됐다. 여기까지가 이날 북쪽이 밝힌 2차 정상회담 상황 설명이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가운데)이 1일 오전 0시15분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한밤 기자회견을 열어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설명을 반박하고 있다. 왼쪽은 최선희 외무성 부상. 하노이/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 북, 사상 처음으로 취재진과 공식 질의응답…회견과 문답 12분간 이어져
이날 리 외무상이 북한 입장문을 낭독한 시간은 7분이 조금 넘었다. 앞서 리 외무상은 기자회견을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리 외무상이 입장문 발표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리 외무상은 회견장을 나가며 최 부상에게 “질문 좀…(대신 받아달라)”이라고 말했다. 각국 취재진의 눈과 귀가 최 부상에게 모아졌다. 취재진은 마이크와 카메라를 최 부상 코 앞에 들이 밀었다.
최 부상은 회견장 앞쪽에 서서 5분 정도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북한 고위 관계자가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과 공식적으로 기자회견 내용에 대한 문답을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28일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현장을 취재하는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비핵화 의사’를 묻자 “(비핵화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는데, 이날 최 부상은 아예 질문을 받기 위해 기자들 앞에 섰다.
기자들은 서로 소리치며 서로 다른 질문들을 토해냈다. ‘미국이 요구한 추가조치가 무엇이냐’, ‘민생을 위한 5가지 제재는 뭐냐’, ‘다음 번 회담은 언제냐’ 등등 질문 소리가 뒤섞여 최 부상이 누구의 물음에 답해야 할지 모를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시기를 묻는 말부터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한 설명 요구까지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최 부상은 “회담과 관련된 질문만 국한시켜 달라”고 했다. 외신 기자에게는 영어로 답변하기도 했다. 중간 중간 손에 들고온 작은 수첩을 보며 답변을 이어갔다.
5분여 시간 동안 이어진 질문·답변을 끝으로 최 부상은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기자들이 뒤를 쫓아가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더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최 부상은 회견장 밖에서 기다리던 리용호 외무상과 함께 호텔 엘레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북한의 ‘한 밤 기자회견’은 12분 만에 끝이 났다.
1일(현지시각) 하노이 멜리아호텔 앞에서 취재진이 리용호 외무상의 기자회견 취재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하노이/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한겨레>가 기자회견장 들어가기까지…숙소서 뛰쳐나와 전속력으로 달려
<한겨레>는 이날 기자회견이 열린다는 정보를 28일 밤 11시(현지시각)를 넘긴 시각에 베트남 현지 소식통을 통해 입수했다. 이 정보가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다보니 밤 12시가 거의 다 됐다. 기자회견이 열린다는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한겨레>는 멜리아 호텔로 뛰어갔다. 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하노이 현지에 파견된 <한겨레> 취재진이 머무는 숙소에서 멜리아 호텔까지는 전속력으로 달리면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루종일 회담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한겨레> 취재진은 숙소에서 쉬고 있던 상황이었다. 복장도 ‘추리닝’ 차림이었다. <한겨레> 기자는 밤 12시가 되기 직전 기자회견 개최 사실을 공식적으로 정부 소식통에게 확인하자마자 추리닝 바지를 입고 맨발에 운동화를 신은 뒤 뛰쳐 나갔다. 베트남 정부가 발급해준 기자 신분증과 휴대전화만 들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호텔 앞 울타리가 쳐진 통제구역 앞에 도착하니 시계는 12시4분을 가리켰다. 잠시 기다리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그려진 붉은 ‘뱃지’(초상휘장)를 단 북쪽 관계자가 나왔다. 기자가 “들여보내주세요”라고 외치자 이 북 관계자는 “한 명씩 합시다”라며 소속 매체와 기자 신분증을 확인했다. 베트남 공안들이 다시 한 번 정확히 신분증을 체크했다. 그제서야 울타리를 넘어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한 층 위층에 있는 1층 기자회견장은 의외로 아담한 크기였다. 취재진이 앉을 수 있는 의자 50개가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이 의자들이 모두 취재진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북쪽에서는 현장에 빨리 도착한 한국의 신문·방송·통신 매체 일부와 각국에서 온 외신 기자, 그리고 카메라 기자들 극소수에게 기자회견 취재를 허용했다. 기자회견이 시작하기 30∼40분 전부터 취재진은 저마다 자리를 맡은 뒤 취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노이/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