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28일 하노이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이틀째 일정을 시작했다. 두 정상은 1대 1 대화 이후 확대회담을 통해 ‘하노이 선언’의 막판 조율에 나선다. 하노이/AFP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 역할을 해달라. 북한 최고지도자의 진의를 파악해달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했다는 말이다. 지난 3월4일 국회의장과 여야 5당 대표 간 월례회동인 ‘초월회’ 모임에 참석한 복수의 참석자들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한 한-미 정상의 통화내용을 소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가 무산된 뒤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이 북-미 사이 중재자가 돼줬으면 하는 의사를 7차례나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같은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문 대통령에게 “북-미 양쪽의 현 상황 평가에 대해서 상세하게 파악을 해야 하고 그외 기관에서 실질적 중재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날 강 장관은 “북-미 간 대화 재개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추진하겠다”면서 “스웨덴 남·북·미 회동 등 경험을 바탕으로 1.5트랙 협의를 개최하는 방안”과 “중국, 러시아 등 관심을 가지는 나라들과의 협조” 등을 예로 들었다. 이에 대해 북-미 대화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스웨덴에서 남·북·미가 모였던 적이 있는데, 남·북·미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6자회담 형식이 될 수도 있다”며 “1.5트랙 정도로 해서 북-미가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장, 대화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차원의 이야기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북-미가 워낙 입장차를 보이니 중국, 러시아의 힘도 보탤 수도 있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중재자가 돼 달라며 손을 내밀었고, 한국 정부는 “실질적 중재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국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또 한국 정부가 발휘할 수 있는 중재 역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 정부 관계자와 한반도 전문가들에게 들어봤다.
■ ‘대통령 특사’를 보내라
북-미 협상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북한 입장을 정확히 알려면 특사를 보내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특사가 “(북-미 대화 과정에서) 어떤 점이 왜곡돼 전달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진의는 무엇인지를 확인해 서로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사는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인물로 정해지기 때문에, 두 정상이 간접적으로 대화하는 효과가 날 수 있다. 실제로 역대 한국 대통령은 남북 관계가 경색되거나, 북-미 간 긴장이 높아질 때 돌파구 마련을 위해 ‘대북 특별사절’을 파견했다. 문재인 정부가 2018년 여러차례 대북 특사를 파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그해 3월7일, 9월5일 공개적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만났는데, 두차례 모두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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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포인트 남북 정상회담’ 추진하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미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4단계 접근법’을 제안했다. ①남북 실무자 접촉 ②중재안 마련 ③남북 정상회담 ④한-미 정상회담 순으로 북-미 대화 재개 물꼬를 터야 한다는 얘기다. 정 전 장관은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남북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며 “지난해 5·26 정상회담처럼 남북 정상의 원포인트 판문점 접촉이 필요하다”하고 조언했다.
지난해 6월12일 1차 북-미 정상회담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5월24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 회담을 취소했다. 북-미 관계가 갑자기 틀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판문점 통일각에서 만났다. 북-미 교착 상황을 풀기 위한 목적 지향적 ‘원포인트’ 회담,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역할로 역사적인 1차 북-미 정상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수 있게 됐다.
다만 정 장관은 원포인트 정상회담을 하기 전 한국 정부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나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를 만나야 한다는 점을 짚었다. 김혁철 대표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스티븐 비건 대표과 실무협상을 진행한 당사자다. 이 때문에 남북 정상이 만나기 전 남쪽 관계자가 김 대표한테 북-미 간 실무회담의 내용과 분위기를 듣고 정확히 파악한 뒤 두 정상이 만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어 정 장관은 “확대회담에 볼턴 보좌관이 참가해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영변 플러스 알파’라고 했는데 그 알파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며 “그 결과를 토대로 한국 정부의 중재안을 만든 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도록 해야 한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서훈 국정원장이 만나서 어디에서 대화가 막혔는지, 미국의 요구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한국이 복안을 만든 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도록 하고, 두 정상이 뭔가 합의안을 만들어 내면 이를 문 대통령이 가지고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는 순서로 진행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미 협상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도 남북 정상의 ‘원포인트 판문점 만남’에 대해 “(북-미) 대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면에서 좋고, 남북 정상의 만남 자체가 북한이 현재 (북-미 사이에서 돌아가는) 판을 깨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북쪽이 남쪽에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 ‘중국’과도 이야기해라
한-미 워킹그룹 등을 통해 한-미 간 소통이 이뤄지는 것만큼 한-중 간 소통도 활발히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한국이 중국의 이야기를 듣는 데 소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중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고, 제재의 실질적인 주체다”라고 짚었다.
미국은 ‘영변 핵 시설을 전면 폐기할 테니 민생 분야 제재를 일부 해제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화와 관련해 영변 핵 시설 폐기 외에 추가적인 조처가 있어야 한다고 맞받았다. 북-미 간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가 아닌 남북 경협 사업에 대한 제재 적용 면제 등 ‘우회적인’ 제재 완화를 제시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구 교수는 “제재 해제 전선에 (한국이) 중국과 함께 동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북한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경을 접해 지리적으로 가깝고, 실제 다양한 투자와 합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이 북-미를 중재하고, 국면을 타개할 방법을 혼자 고민할 게 아니라 중국과의 협의를 통해 북-중 교류 등으로 간접적인 제재 완화를 할 방법을 논의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다.
■ 한국 정부의 비핵화-상응조처 중재안을 만들어라
이번 북-미 회담 합의 무산의 결과이나 성과는 북-미가 각자 생각하는 비핵화의 정의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구갑우 교수는 “북-미는 현재 핵심 쟁점인 비핵화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우리(한국) 안을 만들어 양쪽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번에 드러난 문제는) 9·19 평양공동선언에 명시된 영변 핵 시설 폐기면 (북-미간 타협이) 될 줄 알았다는 것이 아니겠냐”며 “북-미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비핵화의 정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미 협상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현재 한국 정부는 북-미가 각자 제시한 ‘빅딜’의 내용을 알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협의를 하면 중재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상대방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한 것은 맞지만 서로의 다른 입장을 어떻게 중간지점으로 옮길지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최소한 양쪽 입장을 분명히 알았다는 점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북-미) 양쪽의 정확한 입장을 더 확인해보고 우리가 안을 만들어야 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한겨레 자료사진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한국이 중재안을 만든 뒤 이를 한-미 워킹그룹에서 조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남북이 원포인트 회담을 통해 국면을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전 연구위원은 이미 정상 차원의 ‘빅딜’의 조건이 무엇인지 드러났기 때문에 현 국면을 풀려면 “고위급 회담 수준에서 중간 수준의 딜, 또는 ‘스몰딜’이라도 해서 신뢰를 쌓고, 상호 불신을 해소한 뒤 연말이나 내년 봄에 정상이 다시 만나 빅딜을 하는 방안이 있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북한이 영변 핵 시설에서 미국이 우려하는 삼중수소 생산시설이나 우라늄 시설 일부를 폐기하고 미국은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남북 경협에 대한 제재 면제 등을 상응조처를 해주는 방식으로 협의를 해나가라는 얘기다. 조 연구위원은 “(이런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면 신뢰가 쌓이고 상호 불신이 해소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과 미국의 입장을 모두 담은 ‘단계적·동시적·병행적 로드맵’을 한국이 만들어서 북-미를 설득해야 한다”며 “특히 이행까지 염두에 둔 로드맵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처, 곧 대북 체제안전보장 조치를 두 축으로 하는 로드맵을 단계별로 나눠 설계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양 교수는 “1단계에서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을 영구 폐기하고 미국은 북한이 원하는 민생 분야 대북제재를 2∼3개 정도 해제할 수 있다”며 “양쪽의 주장을 조금씩 절충해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로드맵을 일단 설계해두자는 얘기”라고 말했다. 현재 북한은 영변 핵 시설 폐기의 대가로 민생 분야 제재 5가지를 해제해달라고 요구하고, 미국은 영변 플러스 알파를 주장하는 상황이다. 양 교수는 “2단계, 3단계로 올라갈수록 비핵화 조처, 상응조처의 수준은 높아진다”며 “2단계에서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중·단거리 미사일 등을 해결하고, 그다음에는 생화학 무기를 폐기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실무자는 단계별로 ‘이행 검증 합의서’를 만들고, 매 단계를 시작할 때 정상회담을 열어 톱다운 방식으로 추동력을 만든다면 북-미 간 신뢰를 쌓아가면서 비핵화-상응조처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