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9일 경북 포항에서 팀스피릿 훈련 연합상륙작전에 참가한 미군들이 전술훈련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최근 한국과 미국은 해마다 3, 4월에 해온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올해부터 중단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시작한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지난 65년 동안 한반도 상황에 따라 이름과 내용이 조금씩 변해왔다. 처음에는 방어적 형태로 이뤄졌으나, 나중에는 반격을 통한 공격적 성격이 강해졌다. 이번 중단 조처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굳건하게 자리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6년 전 오늘인 1993년 3월8일 오후 5시. 김정일 북한군 최고사령관은 “내일(3월9일)부터 전국 전민 전군의 준전시상태를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팀스피릿 훈련이 북침을 위한 예비전쟁, 핵시험 전쟁”이라 주장했다. 3월9일 시작한 팀스피릿 훈련에는 국군 7만명, 미군 5만명, 미국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 등이 참가했다.
두 달 남짓 진행된 당시 팀스피릿 훈련 기간에 북한군 병사의 외출, 휴가가 취소됐고 병사들은 전원이 삭발을 했다. 북한은 전 부대에 소총 실탄을 지급했고, 병사들이 생활하는 내무실을 지상에서 갱도로 옮겼다. 고위 장교들은 ‘지하 방공호에서 임박한 공격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평양 시내에는 무장 장갑차가 출동해 사회안전부(경찰) 청사 등 주요 기관 주변에 포진했다. 무장경찰이 곳곳에 검문소를 세워 차량의 통행증을 확인했다. 농촌 주민들은 공습에 대비해 집 주변에 방공호를 파야 했다.
팀스피릿 훈련은 최근 한국과 미국이 올해부터 중단하기로 합의한 키리졸브 훈련의 전신이다. 팀스피릿 훈련 한창때는 참가 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렀다. 냉전 시대 팀스피릿 훈련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3~4월에는 한-미 군사훈련과 북한의 맞대응으로 군사적 긴장이 팽팽해졌다. 한반도의 봄은 ‘춘래불사춘’이었다.
한반도 봄은 매년 ‘춘래불사춘’
한국전쟁 휴전 이후 65년 동안 한국과 미국은 다양한 연합훈련을 해오고 있다. 이 가운데 매년 3~4월에 하는 대규모 훈련은 두 나라 정치 상황, 남북관계, 국제정세 등에 따라 이름과 내용, 규모, 성격이 계속 달라졌다. 포커스렌즈(1954~1968), 포커스 레티나(1969~1970), 프리덤 볼트(1971~1975), 팀스피릿(1976~1993), 한-미연합전시증원(RSOI)훈련(1994~2007), 키리졸브(2008~2018). 훈련의 이름과 성격은 바뀌지만, 지휘와 기획은 미국이 맡고 한국이 참가하는 역할 구분은 바뀌지 않는다.
한-미 연합훈련은 1954년에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은 36만명을 파병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맺어지자, 1954년 미군 철수가 본격화됐다. 유엔군사령부 주관으로 1954년부터 포커스렌즈 연습을 시작했다.
1950~60년대 포커스렌즈 훈련은 현상 유지와 방어 성격이 강했다. 한-미는 한국전쟁 재발 상황을 가정해 훈련했다. 북한군 침략을 물리치고 휴전선 근처에 비무장지대를 재설정하는 제한된 훈련 목표를 설정했다. 북한군이 남침하면, 미군과 국군은 한강까지 단계적으로 후퇴하고 서울을 비우는 방안도 검토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해 뺏긴 휴전선 이남 지역을 회복하는 시나리오였다.
1969년 3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기도 여주 남한강 근처에서 열린 포커스 레티나 훈련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훈련은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한국의 불안감을 달래려고 미군 공수부대원들이 미 본토에서 수송기로 공수돼 참가했다. 국가기록원
한-미 연합훈련은 1969년 기동성을 크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이름도 포커스 렌즈에서 포커스 레티나가 됐다. 1969년 3월17일 경기도 여주 남한강 인근에서 첫 포커스 레티나 훈련이 시작됐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주둔한 미 82공수사단 2500여명이 미 본토에서 대형 수송기를 31시간 타고 왔다. 국군 공수부대 600명도 동참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위협에 미국이 얼마나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조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이보다 휠씬 복잡했다. 1969년 3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아주 높아졌다.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수부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 이틀 뒤인 1월23일에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됐다. 1969년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과 소련을 상대해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 있었다. 미국은 군비지출을 줄이고 아시아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다. 한국전쟁 직후 36만명이던 주한미군이 6만명으로 줄었다. 미국은 주한미군 수를 줄이는 대신 신속기동성을 강조하는 포커스 레티나 훈련으로 한국을 달래려고 했다. 만약 북한이 남침하면 미 본토에서 하루 반나절인 31시간 만에 미군이 수송기를 타고 달려오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69년 7월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 각국이 대처하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1971년 미국은 주한미군 7사단 2만명을 철수시켜 베트남에 보냈다. 71년 한-미 연합훈련 이름이 프리덤 볼트로 바뀌었다. 주한미군 7사단 철수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불만을 달래고 북한에는 경고를 하려는 의도였다. 한국과 미국 양쪽을 튼튼하게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나사를 뜻하는 볼트(bolt)가 훈련 이름에 들어갔다.
1973년에는 공세적인 성격인 ‘전진방어’ 개념을 미국이 도입했다. 이전까지는 북한 남침을 격퇴하고 휴전선 이남 지역 원상회복이 한-미 연합훈련의 목표였다. 전진방어 개념은 달랐다. 북한군이 공격하면 미 공군 B-52 폭격기가 24시간 폭격해 북한군의 서울 북부 진입을 막고, 북한 개성을 점령해 9일 만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비무장지대 남쪽에 미군과 국군 포병부대가 전진 배치됐고 이에 맞서 북한 포병도 전진 배치됐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북한이 대남공세를 강화하자 국내에서 안보불안감이 커졌다. 이에 프리덤 볼트를 확대한 팀스피릿 훈련이 1976년 6월 처음 실시됐다. 19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돼 팀스피릿 훈련 등 한-미 연합훈련 주관이 유엔사에서 한-미연합사로 이관됐다.
1976년부터 팀스피릿 훈련이 시작된 배경에는 헬싱키 선언(1975년 8월)도 있었다. 미국과 소련, 유럽 등 35개국이 서명한 헬싱키 선언의 핵심 내용은 주권존중·전쟁방지·인권보호 등이다. 헬싱키 선언으로 유럽에서 더 이상 대규모 군사훈련이 어려워지자, 미국이 한국을 대체 훈련지로 선택했다. 냉전 시기 팀스피릿 훈련에 20만명이 넘는 병력이 참가해 세계 최대 군사 기동훈련이 된 데는 이런 국제정치 배경도 있었다. 이 훈련에는 연합해상작전, 야전기동훈련, 연합상륙작전, 공수낙하훈련, 각종 지원작전훈련 등이 포함됐다. 여기에 핵 폭격 모의훈련까지 들어 있었다.
‘진짜 전쟁’에 대한 두려움
시간이 갈수록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1983년에는 공지전(airland battle) 전략이 도입됐다. 이 전략은 지상군과 공군이 공조해 적진 후방(종심)을 깊숙이 공격하는 전략이다. 한반도 상황에 적용하면, 북한이 남침할 경우 단순 남한 방어를 넘어 전쟁을 북쪽까지 확대해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1992년에는 한반도 작전계획(작계)이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92년에 변경된 작계 5027-92에서는 유사시 미 해병 3사단, 국군 해병 1사단이 동해 원산에 상룩한 뒤 서쪽으로 진격해 평양을 점령하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한-미 보병부대가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진해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미 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한 뒤 핵시설이 있는 영변까지 진출해 핵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도 맡았다.
작계 5027-92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준비 징후 첩보(대규모 탱크부대 이동, 포대가 은폐진지에서 개방 등)가 있을 경우 교전 발생 전이라도 전투태세를 갖춘 미군과 국군을 전방진지에 투입하도록 했다. 남침 준비로 보이는 모호한 징후에도 대북 선제공격이 가능해졌다.
팀스피릿은 한-미가 한반도를 작전구역으로 하는 작계 5027을 적용해 숙달하는 훈련이다. 훈련은 4단계(북한군 남침 전단계-초기 침공 저지-역공을 위한 재편-대규모 북한 공격)로 나눠 진행됐다. 한국과 미국은 팀스피릿이 연례적 방어훈련이라고 설명했지만, 북한은 ‘북침 연습’이라고 격렬하게 반응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북한의 반응을 과장된 엄살이나 한-미 동맹 약화를 노리는 대남전략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대규모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진짜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미 연합훈련이 벌어지면 북한은 병력과 자원을 총동원해 맞대응 훈련을 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북한군은 일반적으로 군사활동뿐만 아니라 건설 현장 투입, 농사 등 경제활동도 병행한다. 한-미 연합훈련 두 달 남짓 동안은 진지나 갱도에 들어가야 해서 이런 경제활동을 접어야 한다. 민간경제에도 큰 공백이 생긴다. 김일성 주석은 1984년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에서 “적들이 팀스피릿 훈련을 벌일 때마다 우리는 매번 노동자들을 군대로 소집해 대응해야 하며 이 때문에 1년에 한 달 반 정도 노동력에 차질이 생긴다”고 말했다.
한-미 공군기에 맞서 북한 공군 미그기가 대응 출격을 하려면 항공유 소모량도 급격히 늘어난다. 경제난으로 유류비를 감당할 수 없는 북한 공군은 평소 전술훈련과 공중정찰을 극도로 통제하고 있다. 부족한 자원을 총동원해 군사 대응을 해야 하는 북한군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1992년 북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중단되기도 했던 팀스피릿 훈련은 1994년 한-미연합전시증원(RSOI)훈련으로 대체됐다. 이 훈련은 한반도 유사시 미 본토에서 한반도로 파병될 미군 증원 병력과 전쟁 물자를 받아 전투지역에 신속하게 배치하고 이들에 대한 한국군의 지원 절차 등을 익히는 훈련이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북한 정권을 제거하고 북한의 주요 시설을 점령하는 한-미 연합훈련의 목표는 그대로였다. 특히 2007년 RSOI 훈련 때 한-미 해병대의 충남 서산 만리포 상륙작전 훈련 때 논란이 커졌다. 당시 현장에서 ‘평양 고립 위해 서해안 상륙작전을 펼친다’는 내용의, 한-미 양국 군 인사에게 한 브리핑이 취재진에게까지 들려 기사로 보도됐기 때문이다.
2008년 2월29일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이 충남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키리졸브 훈련이 북침연습이라며 중단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8년부터는 이름이 키리졸브로 바뀌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선제타격과 북한 지휘부 제거 훈련, 미사일 요격 훈련 등 북한 점령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을 ‘체제 전복’으로 간주하고 훈련 중단을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한-미 연합훈련 중 북한의 공격 조짐이 보이면 선제공격을 허용하기 때문에 훈련 기간 양쪽의 국지적 마찰이나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전될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보수세력은 최근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 중단을 두고 ‘무장해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다른 측면을 강조했다. “북한이 핵을 체제 안정과 유지를 위해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며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정권 전복을 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비핵화/평화체제와 한-미 연합훈련은 무관치 않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문제가 향후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을 열어나가는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2016년 <현대북한연구> 19권 2호)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