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가운데)이 3월15일 평양에서 외교관들과 취재진을 모아 긴급 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통역관이고, 왼쪽에 서 있는 남성은 외무성 북미국 부국장이라고 했지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평양/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제재를 복원하는 ‘스냅백’(snapback)을 전제로 제재 완화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밝혀, 이 방안이 북-미 비핵화 협상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26일 인사청문회에서 “스냅백에 어떤 수준의 내용을 담을 것인가가 향후 북-미 협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냅백은 흔히 경제적 이해가 걸린 무역협상에서 합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보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함으로써 이행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2012년 3월 발효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자동차 분야에도 스냅백이 명시돼 있는데, 투자자-국가소송(ISD) 허용과 함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스냅백은 2015년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타결된 이란 핵합의에도 적용됐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미·중·러·영·프)과 독일이 이란과 맺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는 이란이 합의를 어길 경우 제재를 복원하도록 명시했다. 이란은 유엔 제재의 단계적 해제를 대가로 핵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스냅백은 이란에 우호적이지 않게 짜였다. 합의 당사국들에 유럽연합까지 참여한 연합위원회에서 한 국가라도 제재 해제 지속에 이의를 제기하면 곧바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된다. 연합위원회에선 누구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안보리에선 제재 해제를 지속할지 여부에 대해서만 투표한다. 제재 복원에 반대하는 국가의 거부권 행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다. 30일 안에 투표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동으로 제재가 복원된다.
북한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최 부상이 하노이 회담에서 스냅백을 전제로 한 제재 해제 논의가 오갔다는 것을 공개한 것은, 북한이 이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으로서는 큰 수를 둔 것”이라며 “스냅백 언급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제재 완화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풀이했다.
최 부상은 스냅백에 트럼프 대통령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장애를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도 스냅백에 대한 판단이 엇갈렸음을 시사한다.
스냅백이 미국의 무기가 되기 위해선 발동의 문턱을 최대한 낮추는 등 정교한 셈법이 필요하다. 게다가 현재 대북제재는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미국의 독자제재가 촘촘하게 결합돼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북-미가 스냅백을 논의할 경우 비핵화 조처와 연계한 제재 해제의 순서를 비롯해 합의 위반 여부 판단 방법과 절차 등 복잡한 쟁점이 새롭게 제기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북-미가 여전히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냅백이 합의의 안전판이 되기는 힘들다”며 “북-미 비핵화 협상의 핵심은 여전히 북한이 핵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노지원 기자
m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