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김홍걸 대표상임의장
“민간이 대북 제재의 틈을 뚫고 북과 교류할 수 있도록 관에서 적극적으로 분위기 조성을 할 필요가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시작할 때도 미국에서 100% 사전 동의하지 않았어요. 당시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문제가 되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저지른 것이죠.”
20일 서울 마포역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사무실에서 만난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은 “지금 남북문제에서 필요한 것은 전략이 아니라 평화를 쟁취할 수 있는 용기”라고도 했다. “국내나 미국, 주변국의 동의를 다 얻어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미국 쪽에 ‘우리가 저지를 테니 말리지 마라’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 공단 재개를 미국에 강하게 주장해서 뭔가 이뤄내는 모습을 북한에 보여줘야 비핵화 협상에도 도움이 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그는 재작년 12월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에 취임했다. 민화협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등 200여곳이 민족화해와 통일을 이뤄나가겠다는 뜻으로 설립한 민간단체다. 그가 취임할 때 6명이던 민화협 직원은 지금 12명이다. “열심히 돌아다녀 후원금을 모았어요. 민화협이 사단법인이라 운영비는 회비나 후원금으로 충당해야 합니다. 지난해 남북관계가 풀린 덕도 보았죠.”
취임 뒤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해 모두 네 차례 북한을 찾았다. 작년 7월 평양에 갔을 땐 북쪽 민화협과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봉환 사업을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 첫 결실로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서 희생자 유골 74위를 인수해 지난 3월 제주 선운정사에 임시봉안했다.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가 되면 그곳에 들어설 평화공원으로 유골을 옮기려고 합니다.” 작년 11월과 올 2월엔 금강산에서 남북 민화협 상봉대회와 연대모임 행사도 치렀다.
“오는 11월 초 일본 도쿄 사찰 유텐지에서 강제동원 희생자 추도모임을 합니다. 거기 모셔진 한반도 출신 유골 900기 중 남쪽 출신은 참여정부 때 다 인수했고 남은 400여기는 북 출신이죠. 작년부터 세 차례나 북쪽 인사들이 추도모임에 참석하도록 비자를 내줄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했어요. 노력하겠다는 답만 되풀이하더군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불교계 인사들이 추도모임에 참석합니다. 일본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영친왕 부인(이방자) 집안사람들도 참석하도록 교섭하고 있어요.”
지난 2월 금강산에서 북쪽과 합의한 과거사를 주제로 한 대규모 학술 심포지엄도 최대한 빨리 열 계획이란다. “애초 5월 말 하기로 했는데 하노이 북미회담(2월28일) 결렬로 미뤄졌어요. 지금 비공식적으로 북에서 여러 신호가 오고 있어요. 내달쯤엔 민간 교류가 가능할 것 같아요.” 구상 단계라면서 이런 말도 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을 통과해 서울까지 오는 철도 시범 운행도 추진하려고요. 중국과 북한이 철도 운행을 하고 있어 맘만 먹으면 어렵지 않아요. 실현되면 3국이 함께 새로 철도를 깔아 ‘기차 타고 대륙 가자’는 여론이 높아질 겁니다.”
그는 최근 <희망을 위한 반걸음>(메디치미디어)이란 책을 냈다. 책의 부제처럼 ‘한민족의 공존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남북 경제 협력의 실태와 그 가능성을 두고 많은 논의를 펼친 게 눈에 띈다. 그는 책에서 남북 경협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 전문가가 그래요. 작년 초부터 지금까지 북을 찾아 사업상담을 한 중국인이 6천여명이라고요. 중국 정부의 오케이 사인이 없어서 그렇지 투자할 준비가 다 돼 있어요. 북-미 비핵화 협상이 타결되면 북이 미국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말 그대로 북한에 퍼주기를 할 수 있어요. 중국 기업들은 지금 출발선에서 총소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은 라커룸에서 유니폼도 안 입고 기다리고 있다고 할까요. 일본도 북일 수교 배상금을 최소 300억 달러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돈을 그냥 주지만은 않을 겁니다. 경제적 침투를 하려고 하겠죠.” 그는 “북한이 남쪽에 원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시스템 운영 노하우”라면서 “치밀하게 준비해 북한에 맞춤형 경제협력 솔루션을 제안해야 한다”고 했다.
2년 전 민화협 의장 맡아 네 번 방북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합의
11월 초 도쿄에서 희생자 추도모임
“북쪽 민간교류 재개 ‘신호’ 보내와” 최근 ‘희망을 위한 반걸음’ 출간도
“남북문제는 평화 쟁취할 용기 필요” 그는 2016년 1월 민주당에 입당한 정치인이다. 내년 총선 출마도 생각 중이다. 책을 왜 냈나? “3~4년 전부터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버지 햇볕정책 수립에 관여한 정세현 이종석 전 장관 등을 만나 많이 배웠어요. 박근혜 정권 때 남북관계가 악화하고 아버지가 어렵게 만든 개성 공단이 무단 폐쇄되는 것을 보면서 저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치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죠. 제가 아버지 같은 큰 인물이 아니라, 정치나 사회 문화를 다 다룰 재주는 없어 한반도 문제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죠.” 한반도 평화에 대한 전망을 묻자 그는 “지금이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 정부가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평화의 길을 여는 데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해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뒤에도 남북 민간교류가 어려움을 겪었어요. 겉으로 보면 북한에서 문을 닫고 있는 게 큰 문제이죠. 하지만 근본 문제를 따지면 우리도 문제가 있어요. 아버지는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부와 민간이 50대 50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남북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민간이 치고 나가야 한다는 거죠. 지난해 4·27, 9·19 남북 선언이 나온 뒤 정부에서 민간이 치고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밀어줬어야 했어요. 통일부가 지난 박근혜 이명박 정부 때 너무 기가 죽어 남북 화해시대에도 몸을 많이 사려요. 구설에 안 오르려고만 합니다.”
그는 책에서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대일 외교를 두고 ‘일본과 생각이 다른 부분은 그것대로 두되, 협조해야 할 부분은 협조하라’고 조언했을 것이라고 썼다. 또 “아베 정권이 쳐놓은 함정에 빠지지 말도록 조심하라고 하셨을 것”이라고도 했다.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의미? “일본 외교는 박근혜 정권이 잘못된 위안부 합의를 해 수렁에 빠졌어요. 하지만 문재인 정부도 백 퍼센트 잘했다고 볼 수 없어요. 좀 더 적극적으로 일본과 대화를 해야 했죠. 지금 외교부 사람들이 박근혜 정권 때와 같은 관리들입니다. 자신들이 잘못된 합의를 한 뒤 다시 일본 파트너를 만날 때 주눅이 들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일본 파트너를 만나는 것도 피하려 했을 겁니다. 정치권에 물밑에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지일파가 없는 것도 문제죠. 김종필 박태준 전 총리처럼 일본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정치권에 없어요.”
부친의 후광이 주변국 주요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형성에 많은 도움을 준단다. “일본에 가더라도 누구 아들이라고 하면 주요 인사들을 만나는 게 수월해요. 아버지는 일본 공산당부터 자민당 우파까지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존중과 인정을 받았어요. 아버지를 매개로 얼마 전 아베 측근인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재생담당상을 만났어요. 7년 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와 붙었던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도 작년에 만났죠.”
그의 부친은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뤄냈고 남북 화해 노력으로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뭔가? “훌륭한 스승을 앞에 두고도 그분의 소중한 가르침을 살아계셨을 때는 깨닫지 못했어요. 좋은 말씀을 해 주셔도 저는 엎드려 자고 한눈을 판 학생이었죠. 돌아가신 뒤에야 잘못을 깨우쳤어요. 저는 돌아온 탕아입니다. 아버지가 1980년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신군부가 협력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의연하게 ‘광주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배신할 수 없다’며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택하셨어요.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그런 모습에서 큰 가르침을 얻습니다.”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아버지 말씀처럼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믿어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 효도를 못 했어요.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고 싶어요. 국회의원이 안 되더라도 그쪽으로 기여하고 싶어요.”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그의 부친이 남긴 어록이다. 아버지 생각에 동의하나? “아버님은 저보다 낙관적이셨죠. 감옥에서 볼 수 없었던 책을 읽을 수 있어 감옥 들어온 게 복이었다고 말씀하신 분이죠. 모든 걸 긍정하셨죠. 그런 마음으로 수많은 고난을 넘길 수 있었죠. 그런 마음을 갖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김홍걸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지금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답게 사회에 공헌할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 제힘으로 일어서 돌아가신 어른의 발자취를 따를 기회를 얻어서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강성만 선임기자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합의
11월 초 도쿄에서 희생자 추도모임
“북쪽 민간교류 재개 ‘신호’ 보내와” 최근 ‘희망을 위한 반걸음’ 출간도
“남북문제는 평화 쟁취할 용기 필요” 그는 2016년 1월 민주당에 입당한 정치인이다. 내년 총선 출마도 생각 중이다. 책을 왜 냈나? “3~4년 전부터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버지 햇볕정책 수립에 관여한 정세현 이종석 전 장관 등을 만나 많이 배웠어요. 박근혜 정권 때 남북관계가 악화하고 아버지가 어렵게 만든 개성 공단이 무단 폐쇄되는 것을 보면서 저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치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죠. 제가 아버지 같은 큰 인물이 아니라, 정치나 사회 문화를 다 다룰 재주는 없어 한반도 문제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죠.” 한반도 평화에 대한 전망을 묻자 그는 “지금이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 정부가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평화의 길을 여는 데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해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뒤에도 남북 민간교류가 어려움을 겪었어요. 겉으로 보면 북한에서 문을 닫고 있는 게 큰 문제이죠. 하지만 근본 문제를 따지면 우리도 문제가 있어요. 아버지는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부와 민간이 50대 50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남북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민간이 치고 나가야 한다는 거죠. 지난해 4·27, 9·19 남북 선언이 나온 뒤 정부에서 민간이 치고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밀어줬어야 했어요. 통일부가 지난 박근혜 이명박 정부 때 너무 기가 죽어 남북 화해시대에도 몸을 많이 사려요. 구설에 안 오르려고만 합니다.”
<희망을 향한 반걸음> 표지.
김홍걸 상임의장은 1982년 고려대 불문과에 입학해 11년 만인 1993년 졸업장을 받았다. 석사 학위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받았다. 논문은 한국의 아이엠에프(IMF) 위기 극복을 주제로 다뤘단다. 특별한 아버지를 둔 탓에 대학 생활도 남달랐다. “고려대에 들어갈 때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에서 당시 김상협 고려대 총장 비서를 찾아 저를 합격시키지 말라고 압박했다고 해요. 김 총장이 압력에 굴하지 않았죠. 그분이 고려대 재단 실세라 가능했을 겁니다.” 고려대를 1년 다니다 미국 망명을 떠나는 부친과 함께 도미해 에모리대학 학부 과정을 3년 다녔단다. “1년 더 다녀 에모리대를 졸업하려고 했으나 전두환 정부에서 미국 체류 연장을 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귀국해 고려대에 복학했죠. 군대를 다녀와 93년에야 학부 졸업을 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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