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드하트 미국 방위비분담협상 대표가 19일 “한국의 제안이 우리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협상을 깨고 나선 것은 미국의 요구가 이제 ‘압박’을 넘어 ‘강요’의 수준으로 올라섰음을 보여준다. 협상의 파행을 드러냄으로써 한-미 동맹 위기론을 부추겨 한국을 굴복시키려는 ‘계산된 노림수’라고 할 수 있다. 협상 대신 힘을 통해 문제를 풀려는 ‘외교적 갑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드하트 대표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강압적이다. “한국이 준비가 됐을 때 협상이 재개될 것”이라거나 “한국 쪽에 재고할 시간을 주기 위해 협상을 일찍 끝냈다”는 설명은 애초 이번 협상의 목표가 한국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양보를 확인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협상 중단의 책임도, 협상 재개의 책임도 한국에 있다는 식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미국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펼친 전술”이라며 “한국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협상을 깨고 나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협상이 이처럼 파행을 겪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요구가 과도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올해 한국이 부담하는 방위비 분담금의 6배에 가까운 50억달러(약 6조원)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껏 유지돼온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에 규정되지 않은 △주한미군 인건비(수당) △군무원 및 가족 지원 비용 △미군의 한반도 순환배치 비용 △역외훈련 비용 등 새로운 항목을 들이밀고 있다. 미국은 이런 것들이 과거 협정에서 계산하지 않은 ‘미국의 기여’라고 주장하지만, 금액을 정해놓고 근거를 만들어냈다는 지적이 미국 안에서도 일고 있다.
2019년 11월18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정은보 한미방위비분담협상 대사(왼쪽)가 제임스 드하트 미 국무부 방위비분담협상 대표(오른쪽)를 만났다. 제11차 방위비분담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3차 회의 첫날 모습이다. 미국 대표단은 19일 열린 둘째 날 회의에서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자리를 떴다. 외교부 제공
한국은 이번 협상에서 기존 협정의 틀을 유지하면서 합리적이고 공평한 분담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이 수용할 수 있는 분담 기준 가운데 하나는 ‘국방비 증가율’(2020년의 경우 전년 대비 7.4%) 수준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 체결된 10차 협정에서도 이 기준을 적용했다. 정부는 물가상승률, 국내총생산(GDP) 상승률 등 여러 지표를 검토했으나, 국방비 증가율이 그나마 높은 수준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박재민 국방부 차관은 이날 국회에서 “현재 협정 체계 내에서 적정한 증가율을 목표로 협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이런 입장 차이를 관리들을 동원해 억지로 메우려 하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장인 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은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지난 7일 관저로 불러 방위비 분담금으로 50억달러를 내라는 요구를 20번 정도 반복해 당황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절박감과 집요함이 드러난다. 지난 15일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 참석한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대한민국은 부유한 나라”라며 “연말까지 한국의 분담금이 늘어난 형태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런 접근이 동맹의 이익을 배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한국을 본보기 삼아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관철시킴으로써 다른 동맹국들의 저항을 미리 차단하려 한다. 미국은 내년 3월 종료되는 미-일 방위비 분담금 협정을 대체할 협상에서 지금보다 4배 많은 80억달러를 일본에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도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동맹이 이제 공동의 이익과 가치에 기반하기보다는 거래에 기초한 관계로 바뀌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강압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가 임박한 가운데 가중되는 상황도 주목할 만하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한-미 동맹 위기론을 부추겨 회담장 밖에서 한국을 흔들려는 여론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조성렬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미국이 조금만 압박해도 한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는데, 이제 한국 정부가 원칙을 유지하며 버티자 눈에 빤히 보이는 무리수까지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박민희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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