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깊이 연구해온 학자이자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외교안보정책을 지휘했던 이종석 전 장관이 지난 7일 경기 성남 세종연구소에서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트럼프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기대를 접고, 한국이 자체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정교한 대안을 미국 대선 전에 공개적으로 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미 대선을 앞두고 북-미 북핵 협상을 비롯해 중요한 외교가 모두 멈춘 상태지만, 우리가 지금 스냅백(약속이 이행되지 않으면 기존 조치를 철회) 조항을 기초로 비핵화와 제재 완화를 진전시킬 해법을 내놓고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차기 미국 행정부와 함께 비핵화 협상을 제대로 진전시켜 나갈 중요한 기반이 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주한미군 방위비 대폭 인상 압박 등 동맹 무시 정책에 반발하면서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트럼프의 재선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많지만, 이 전 장관은 “동맹의 말에 귀기울일 줄 하는 민주당의 바이든을 선호한다”고 했다.
수십년간 북한을 깊이 연구해온 학자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외교안보정책을 지휘했던 이 전 장관을 지난 7일 경기도 성남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만나, 북핵 해법부터 남북관계, 미-중 갈등, 한일관계, 주한미군의 미래까지 한국 외교의 청사진을 질문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일에도 ‘재선된다면 북한과 매우 빨리 협상하겠다’면서, 자신이 당선되지 않았으면 북한과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왜 트럼프가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가.
“고 김대중 대통령은 훌륭한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춰야 한다고 하셨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인적 현실감각은 뛰어나지만, 한반도 평화가 왜 필요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적 판단과 구상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 의식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북한에 회의적인 미국 여론을 설득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합의를 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이를 이행할 시스템도 없다. 볼턴 회고록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 안에서 트럼프, 폼페이오, 볼턴의 북핵 문제에 대한 생각이 각자 다른 ‘봉숭아 학당’ 상태다. 지난 2년간 트럼프의 행보를 지켜본 결과, 그가 재선되는 게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문재인 정부의 북핵 해법은 ’트럼프 설득을 통한 톱다운 해법’에 초점을 맞춰왔는데, 이제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우리가 스스로 정교하고 구체적인 북핵 해법을 마련해 공론의 장에 내놓고 실현을 위해 꾸준하게 노력해야 한다. 핵 문제는 우리 운명을 좌우할 사활적 과제다. 대한민국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분명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미국과 불협화음을 감수하고라도 일관되게 설득하고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가 한번도 우리 정부의 북핵 해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항상 비공개적으로만 설득하다 안되면 그만이었다. 한국은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트럼프 행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아마추어나 마찬가지다. 볼턴처럼 편견을 가진 무지한 사람들이 한반도 정책을 해왔다. 북한은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중단했고, 9.19 남북 정상 공동성명에서 영변 핵시설과 동창리 엔진실험장을 포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조처를 모두 완료해야만 제재를 완화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한국은 스냅백 조항을 활용해,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제재 완화가 단계적 동시적으로 진행되게 하고, 만약 중간에 북한이 비핵화를 중단하는 등 약속을 어기면 다시 제재를 복원할 수 있는 형태의 해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공개적으로 내놓고 설득해야 한다.”
―바이든이 당선되든, 아니면 트럼프가 재선되든 한국은 어떤 외교적 준비를 해야 하나.
“우리가 정교한 북핵 해법을 만들어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이 아니라 지금 미국 대선 전에 내놔야 한다. 바이든이 당선된다면 한국은 이런 입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차기 미국 행정부가 출범하도록 해야 한다. 대선 결과가 나온 다음에 당선자 측근들의 귀를 잡으려고 하면 늦는다.
우리 안을 가지고 북한도 설득하고 미국도 설득하는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에는 스냅백을 전제로 한 단계적 조치가 왜 미국에도 도움이 되는지 설득해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핵실험과 ICBM 발사를 중단하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다. 그 다음 단계로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전문가 입회하에 폐기하고 동창리 엔진실험장 폐기 등 후속 조처들을 해 나간다면, 미국은 제재 완화, 대표부 설치, 평화협정 체결 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북한이 중간에 약속을 어겨서 스냅백을 하게 된다면, 북한이 파기한 시설들은 복구가 어려워 불가역적 조처가 된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완화해주면 그 사이에 부유해진 북한이 더이상 비핵화를 진전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북한이 원하는 것은 외부 자본을 유치해 자국의 토지·노동력과 결합해 고도성장을 하는 게 목표다. 일정한 시점에서 북한이 비핵화 합의를 위반해 모든 자본이 철수한다면, 한국·미국·중국 자본도 손해를 보겠지만, 북한 경제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이런 논리를 대통령부터 외교관, 학자들까지 미국에 동일하게 설명해야 한다. 미국과 이견이 있더라도 공개적으로 얘기하면서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쌍방의 입장 차이가 명확한 경우 비공개로 논의해서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설득할 수 없지만, 공론의 장에 내놓으면 국제사회가 한국 말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미국도 절충을 선택하게 된다. 참여정부 시절, 부시 행정부가 우리 얘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론의 장에서 얘기했을 때는 부시 행정부가 물러설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이 당선된다면, 그동안 트럼프와 북한이 맺은 합의는 모두 무효가 되고, 기존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전략적 인내’로 되돌아가 북미 핵협상이 정지되고, 동북아에서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반중국 동맹을 강화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미국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대북정책이 온건하거나 유연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 대해 회의적이고 불신하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동맹관계에서 일방적이었고, 민주당은 동맹국 의견을 경청하는 쪽에 가까웠다. 민주당 정부는 한국 정부가 논리를 가지고 설득하면 듣는 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부시 공화당 행정부가 동맹을 무시하고 동맹관계를 훼손시켰다며, 부시 정부가 한국 정부의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깔봤다고 비판했다. 이번에는 바이든이 같은 맥락에서 트럼프 정부가 동맹관계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방위비 협상 등을 비판하고 있다. 바이든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 아무래도 동맹의 얘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동맹에 귀를 기울일 자세가 되어 있었지만, 당시는 동맹의 대통령이 이명박, 박근혜였다. 탈냉전 이후, 한미간에 한반도 평화와 북미관계에 대해 가장 진전을 이룬 것은 1998~2000 김대중 대통령 정부 초기-클린턴 행정부 후기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부시 행정부가 등장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비난하고 클린턴 정부의 모든 정책을 비난하면서, 한반도 정책에서 일방주의로 나아갔다. 지금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북핵 해법을 내놓고 설득한다면, 공화당 정부에 비해 바이든 정부가 더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바이든에게 기대를 거는 편이다.”
북한을 깊이 연구해온 학자이자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외교안보정책을 지휘했던 이종석 전 장관이 지난 7일 경기 성남 세종연구소에서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북한도 김여정의 ‘미국 독립 기념일 DVD를 갖고 싶다’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 대선 이전 북미 3차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는 해석도 있다.
“김여정이 미국 독립기념일 DVD를 얘기한 것은 경우에 따라 미국이 초청하면 백악관을 방문할 수도 있고 3차 북미 정상회담에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3차 북미 정상회담을 해낼 수 있을지, 북미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합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3차 북미 정상회담을 한다면 트럼프는 북한에 대해 굉장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미국 조야를 만족시킬 정도의 양보를 북한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는 이미 트럼프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이 트럼프와의 3차 정상회담에 미련을 가지고 있더라도 트럼프가 대선에 필요한 ‘남는 장사’를 해야 하는데, 김정은이 제재 문제에 대한 답도 없는 상태에서 트럼프에게 무엇을 더 줄 수가 없다.”
―북한은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규탄한 6월4일자 김여정 담화에 이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업지구에 연대급 부대 전개와 접경지역 군사훈련 등을 공언했다. 그런데 6월23일 북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시켰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기본적으로 대북 전단지에 대한 문제였다, 북한의 남쪽에 대한 불신이 심화돼 있고 전단지 문제를 계기로 폭발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끌고갈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이 대북 전단지 살포에 대해 얼마나 강력하게 대응하고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지에 달려 있는 상황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가 어렵고 코로나19 문제도 있는 가운데 남북관계를 계속 악화시키고 군사적 충돌지점까지 간다면 북한 사회에 군사화의 분위기가 만연되어 경제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해, 그 지점에서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시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대북전단금지법이 만들어지지 않고 또다시 대북 전단지 문제가 악화되면, 북한이 다시 행동에 나설 수 있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상황이 끝났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전단금지법은 끝난 문제가 아닌 보류된 위험요소다. 대북전단금지법 제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통일부가 나서서 당정 협의를 해서 국회에 제출된 여러 안 가운데서 정리를 해야 한다.”
―‘남북관계’에 초점을 맞춘 외교안보팀에 대해 기대가 상당히 높다. 안보팀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은 대북전단금지법을 제정하는 것, 그리고 4.27 판문점 선언과 9.19 남북 평양합의 내용 가운데, 제재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 구체적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핵 해법과 관련해 한국의 구체적 버전을 내놓는 것이다. 현재 남북 정상선언이 이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사소한 조처로는 풀어지지 않는다. 취임 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행보는 긍정적이다. 조금 더 담대한 행보를 기대한다. 개별 관광, 남북 철도 연결 등을 어디까지 진전시킬 수 있는지 방안을 정부가 찾아내야 한다. 남북협력은 북방 경제를 만들어내 어려운 한국 경제의 창을 열기 위한 길을 닦는 것이다. 북한과의 협력, 그리고 중국 동북3성, 러시아 연해주 극동까지 이어지는 경제권을 만들고 이를 통해 남북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북한이 준비가 안 돼 있었지만, 김정은은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문제는 핵이 남아 있다. 북방경제나 남북경협이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먼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핵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느냐에 따라 곧 갈 수 있는 길이다.”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고 특히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반중 연대에 동참하라는 압력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은 어떤 전략과 원칙을 마련해야 하는가.
“5월20일 백악관은 ‘중국 전략보고서’에서 ‘중국이 우리 가치에 도전’한다며 이념 문제를 언급했다. 냉전의 완전한 데자뷔이고 진짜 신냉전으로 갈 수 있다. 미국 대선 이후에도 이런 식의 흐름이 자리잡는다면 정말 굉장히 위험하다. 미-중간 디커플링은 심화될 수 밖에 없고 한국은 이미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의 경제번영네트워크(EPN) 동참 요구,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7개국(G7) 정상회의를 G11으로 확대하려는 것은 대중 견제에 한국의 동참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동맹과 다자협력의 두 가치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지만, 한미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중국과의 대등하고 건전한 관계를 위해서라도 한미동맹이 필요하다. 중국은 다자협력을 선호하고 미국도 다자협력을 공공연히 반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동맹과 다자협력의 병행 추구라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사안별로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이 숙명이다.”
―미-중 갈등이 북한에 도움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북한이 중국-러시아와 연대해 자력갱생으로 버티는 게 현실성이 있는가?
”지금 같은 미-중 관계는 북한에도 안좋다. 중국은 북핵 이슈와 대북제재에서는 미국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미중갈등이 더 심화되고 디커플링이 어느 수준에 가면 중국이 미국의 북핵 정책을 더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대북 제재를 해제하려 할 것이고, 동북아 정세는 요동치게 된다. 미중 갈등이 더 심각해지면 북한은 중국에 의존해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늦기 전에 이 시점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버전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6자회담과 같은 다자협력을 살려서 미국과의 협력에만 의존하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중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6자회담을 만든 것은 미국이다. 부시 대통령이 장쩌민 주석에게 중국도 북핵 해결에 간여하라고 했고 중국이 3자회담을 하다가 잘 안되니 6자회담이 됐다. 이번에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니까 우리 정부가 중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결국 북-미에만 맡겨놨다가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외교안보정책을 지휘했던 이종석 전 장관이 지난 7일 경기 성남 세종연구소에서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한일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일본 아베, 정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계속 방해해 왔다. 이제는 적기지 선제공격 능력으로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능력을 갖추겠다고 한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다. 한-일의 마주보는 열차는 이미 계속 여러번 부딪혔다. 다만 시속 30킬로미터 정도로 속도를 낮춰서 죽지는 않지만, 서로 상처를 입으면서 계속 부딪히고 있다. 일정하게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가 최악이 된 것은 역사문제를 한일관계 전면에 끌어냈기 때문이다. 처음에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전면에 끌어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위안부 문제에 강제동원 문제까지 전면에 나오면서 더 그렇게 됐다. 최소한 역사·정치문제와 민간외교·경제·문화·북핵 문제 등이 나눠서 논의되도록 투트랙으로 복귀해야 한다. 하나의 공유점이 있다면 북핵 문제다. 북핵 문제를 풀어가면서 접점을 찾아야 한다.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일본은 북일관계 개선을 원하고, 우리도 그것은 긍정적으로 본다. 이런 협조의 공간을 만들어서 한일관계를 다시 투트랙으로 복원시키는 길로 가야 한다. 일본이 우리 양해 없이 북한을 선제 공격할 능력을 갖춘다고 하는데, 우리의 양해가 있든 없는 일본이 북한을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일 갈등이 일본이 군국주의·군사대국화의 길을 터주는 면이 있다. 북핵문제에서 일본은 미국 대북 강경세력의 전위대가 되어서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북일수교, 북핵 문제에서 한·일이 협력하면서 최악의 한일관계를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를 고려해 한미 훈련을 연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결국 16일부터 훈련이 진행된다. 문재인 정부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진행되는 데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북핵 문제 해결이 절체절명의 과제이고 그것을 위해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이 필요하다면 왜 중단하지 못하는가. 북한 입장에서 비핵화는 사지나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상대방의 살점을 떼어내면서 내 몸에서 피 한방울 안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전작권 전환을 위해 한미 연합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도 미국이 만든 조건이다. 지금 추진 중인 전작권 환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것과 다르다. 그때는 한미 양국이 각각 단독 전작권을 행사하는 형태였다. 지금은 미래 한미연합사를 또 구성해 사령관만 우리나라 대장이 맡는다. 그런데 미래 한미연합사의 부사령관인 주한미군 사령관이 유엔군 사령관을 겸임한다. 뭔가 위계도 안맞는 느낌이다. 미래 한미연합사라는 것을 만들고 작전 능력을 본 뒤에 전작권을 준다는 것은 이미 변질된 전작권 환수다. 박근혜 정부에서 만들어진 틀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비 확대와 무기 대량 구입에 대한 비판 여론도 많은데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남북간 신뢰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상대방이 군비 축소를 하지 않는데 우리만 축소할 수 없다. 남쪽이 왜 과도하게 성능이 좋은 F-35A를 구매하느냐, 왜 북한은 잠수함 발사미사일(SLBM)을 만드느냐, 전략적 거부 능력을 갖추려는 것이다.다소 생경하게 들릴지 모르나 남북평화협력 시대가 실현될 경우 우리가 안아야 하는 안보 딜레마를 하나 예로 들어보겠다. 만약 10년 뒤 남북이 핵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남북연합을 향해 가면서 한반도 공동안보를 위한 주체가 됐다고 가정해보자. 지금 남북이 서로의 무기가 위험하다고 비판해 그런 무기를 다 없애면, 남북이 공동안보 주체가 됐을 때 무엇을 갖고 주변의 위협에 대비할 것인가. 항공전력과 미사일 전력이 없으면 우리를 지킬 수 없다. 남북공동안보시대에 이 무기체계들이 한반도에 대한 주변의 위협을 막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변 국가들이 군축을 하고 있지 않은데, 우리가 이 딜레마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반도 중립국가를 얘기하는데 불가능하다. 지난 수천년간 수백번의 외세 침략을 받은 반도, 태평양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가교에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을 생각하면, 무기를 다 포기한 영세 중립국이 되는 것은 어렵다. 최소한의 국방력을 유지하는 균형을 잡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방위비와 연계된 주한미군 감축 전망이 계속 나왔다. 최근 주독미군이 감축되고, 미국이 자체 필요에 주한미군 재배치를 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많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대에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했고, 노무현 정부 때도 1만2500명이 나갔다. 지금 주한미군 약 2만8500명이 남아 있다. 어느 정도의 주한미군이 남아 있어야 하는지는 군사적 판단의 문제이지 정치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지금 전쟁 양상이나 무기 체계가 옛날과 다르다. 드론으로 전쟁을 하는 시대다. 한미동맹은 공고하게 남아있어야 하지만, 주한미군의 적정 숫자나 한반도에 주둔하는 게 꼭 필요한지에 대해 앞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논쟁이 될 날이 올 것이다. 모든 동맹에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아니다. 주한미군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기본적으로 냉전의 유산이지만,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운명적으로 한중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중관계는 군사적 문제 이전에 경제적 차원에서 매우 비대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중국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이고,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결과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도움이 된다. 다만, 우리가 미국에 의존적이 아닌 호혜적이고 수평적인 동맹관계가 되면, 중국도 한미동맹에 대해 뭐라고 못한다. 이것이 한미동맹의 새로운 의미다. 통일 이후의 방안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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