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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내일 아침 북에 전화하면 누구라도 아무 일 없듯 받았으면…”

등록 2020-09-13 18:25수정 2020-09-14 02:36

[짬]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박진원 남쪽 사무처장

박진원 사무처장. 이제훈 선임기자
박진원 사무처장. 이제훈 선임기자

“14일 아침엔 북으로 전화를 걸어 볼 생각입니다. 북쪽 대표 누구라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여보시오? 전화 받습니다’라고 대답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박진원(54)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이하 공동연락사무소) 남쪽 사무처장은 13일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14일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4·27 판문점선언’에 따라 공동연락사무소가 문을 연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다.

지금 공동연락사무소 건물 자리는 “시꺼먼 폭연과 뒤엉킨 콘크리트 더미”의 폐허다. 북쪽이 6월16일 오후 2시50분, 일부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등을 문제 삼아 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해버린 탓이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져내렸다고 그곳에서 일하던 남북의 사람들마저 부서진 건 아니다. 2018년 9월14일 개소 때부터 ‘코로나19’ 탓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철수한 2020년 1월30일까지 504일 동안 한 건물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사람들은 지금도 숨을 쉬고,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박진원 처장은 “다들 상기된 표정으로 남북의 미래를 축복하고 덕담을 나누던 2년 전 그날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너무 맑고 깊게 푸르러 오히려 서러운 가을하늘에 ‘간절한 바람’을 날린다.

공동연락사무소는 남과 북이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에 따라 당국 간 협의를 긴밀히 하고 (민간을 포함한) 교류와 협력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해 구성·운영에 합의”(‘남북공동연락사무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전문)해, 남과 북의 당국자들이 한 건물에서 일을 한 분단 70년사 최초의 쾌거였다. 박 처장은 2017년 5월10일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선임행정관으로 일하다, 2019년 7월말부터 공동연락사무소의 남쪽 사무처장으로 일터를 바꿨다.

4·27 선언으로 2년 전 오늘 개소
코로나로 철수할 때까지 504일
남북 당국자 한 건물서 희로애락
북, 대북전단 문제 삼아 6월 폭파

“철도도로 착공 등 적지 않은 성과
밤늦은 시간 대화도 독보적 강점”

4층짜리 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은 박 처장한테는 “창이 많아 해가 잘 들던 건물”로 기억된다. 아침 일찍 사무소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숙소를 나와 건물 로비에 들어서면 남북의 사람들은 따뜻한 눈인사를 하고 남쪽은 2층, 북쪽은 4층 각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북의 일꾼들은 공동연락사무소 건물에서 함께 일한 504일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두 차례 ‘연락대표협의’를 했다”.(월~금 근무일 기준) 격무에 시달리다 각자 2·3층 난간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기도 했단다. “공기 중에 남북의 연기가 어우러지면 묘한 감동이 일었다”고 박 처장은 회상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쪽 인력 숙소 옆 빈터에 박진원 사무처장 주도로 일군 ‘통일배추’밭. 2019년 이른 겨울, 김장을 담그려고 배추를 수확하다 남쪽 인력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박진원 제공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쪽 인력 숙소 옆 빈터에 박진원 사무처장 주도로 일군 ‘통일배추’밭. 2019년 이른 겨울, 김장을 담그려고 배추를 수확하다 남쪽 인력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박진원 제공

박 처장은 일터를 개성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9년 8월 개성 숙소 옆 빈터에 사무소 사람들과 함께 배추밭을 일궜다. “남쪽 모종을 북쪽 밭에 심었으니 나름 통일배추”였다. 지난해 이른 겨울 그 ‘통일배추’로 김장을 했다. “아껴 먹는다고 이곳저곳 냉장고에 나눠 뒀는데, 다 먹지 못하고 두고 왔다”고 그는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박 처장이 개성에 가자마자 배추밭을 일군 덴 이유가 있다. “남북관계도 결국은 사람의 일이잖아요. 사람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일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뿌리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2019년 이른 겨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쪽 인력 숙소 옆 빈터에서 일군 ‘통일배추’로 김장을 담고 있는 남쪽 인력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박진원 제공
2019년 이른 겨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쪽 인력 숙소 옆 빈터에서 일군 ‘통일배추’로 김장을 담고 있는 남쪽 인력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박진원 제공

개성에서 북쪽 사람들과 함께한 504일, 박 처장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작지 않은 성과도 이뤘다”고 짚었다. “산림·보건의료·철도도로·체육 회담 같은 크고 작은 회의가 열렸고,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 개성 만월대(고려왕궁터) 유적 공동 발굴 같은 일을 개성에서 남북이 함께하며” 얽힌 실타래를 풀어 ‘공동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공동연락사무소의 독보적 강점은 “급할 때는 밤늦은 시간에도 북쪽 숙소에 찾아가 잠든 사람을 깨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연락사무소였기에 가능한 일들”이라고 박 처장은 감회에 젖어 말했다.

박 처장이 보기에, 2020년은 한반도에 사는 누구에게나 ”참 힘든 해”다. 코로나19와 아홉달째 사투를 벌여 지칠대로 지쳐 있는데, 긴 장마에 태풍까지 연이어 몰아닥친 탓이다. “공동연락사무소가 건재했다면 예전처럼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맞대고 이 어려운 시기를 남북이 함께 이겨낼 방법을 상의할 수 있을텐데…, 답답하고 또 답답합니다.”

“더워지기 전에 돌아가게 되리라” 여긴 단절의 시간이 기약없이 늘어지고 있지만, 박 처장은 ‘희망의 끈’을 놓을 생각이 없다. “연락사무소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 (마지막) 통화를 마치며 북쪽 대표가 전한 ‘코로나 조심하십시오’라는 인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14일 아침 박 처장이 북쪽으로 무작정 걸 전화에 “박 선생, 무사하구만요”라는 대꾸가 너털웃음과 함께 하기를.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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