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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우리 마음에 평화 심으려 북 동포에 편지 쓰기 시작했죠”

등록 2021-03-28 18:37수정 2021-03-29 02:08

[짬]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이상석 전 교사

북녘동포에게 편지쓰기를 하고 있는 이상석 전 교사.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제공
북녘동포에게 편지쓰기를 하고 있는 이상석 전 교사.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제공

“내게 있어 통일은 피카츄나 돈가스보다 필요 없는 것이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통일만 될 수 있다면 누구보다 앞장설 거야. 남북에 살고 있는 모든 누나, 형, 동생, 선생님, 어르신, 개, 고양이, 비둘기야 이제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자.”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이메일 koreletters@gmail.com)이 최근 엮은 책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이메일 koreletters@gmail.com)이 최근 엮은 책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

‘남녘에 사는 중학생 얼짱 진우’가 미지의 북한 동포에게 쓴 편지다. 노무현재단 해운대 지회 회원 30여명이 지난해 7월 만든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이 최근 발간한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에는 130여명의 남쪽 사람이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140여통의 편지가 실렸다.

편지쓰기를 처음 제안하고 책 발간도 이끈 이상석 전 교사는 진우의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단다. “개나 고양이까지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마음은 어른들은 죽었다 깨도 갖기 힘들어요. 이 편지를 보고 마음이 밝아지고 애잔하기도 해 진우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지난 25일 전화로 만난 그는 “편지 백통은 개인 일로 그치겠지만 만통을 쌓으면 세계가 주목할 것”이라며 ‘북녘동포에게 편지 쓰기’를 전국 운동으로 넓힐 뜻을 밝혔다.

그는 79년부터 35년 가까이 국어 교사를 하면서 특히 글쓰기 교육에 힘을 쏟았다. 6년 전에 퇴직하고도 지금껏 어른 글쓰기 모임을 다섯 개나 꾸리고 있다. 전교조 창립 때 부산지부 부지부장을 맡아 해직을 겪기도 했던 그는 베스트셀러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88년)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랑으로 학생들과 만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과 2년 뒤에 나온 속편은 모두 40만권 가까이 팔렸다.

그의 편지쓰기 제안은 지난해 급격히 나빠진 한반도 정세와 맞물려 있다. “북한이 지난해 6월에 남북 경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걸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어요. 남과 북 정상이 판문점 선언을 한 지 불과 2년 만이잖아요. 그때 편지쓰기를 생각했죠.” 왜 편지일까. “(사무소 폭파는) 북한 쪽 잘못도 있지만 남쪽도 삐라를 뿌리는 등 부추긴 측면도 있어요. 북을 증오만 했던 우리 잘못을 반성하고 먼저 우리 마음에 평화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선 편지쓰기가 중요하다고 봤죠. 편지를 쓰려면 우선 마음을 열어야 하잖아요. 편지에서 욕을 할 수는 없어요. 서로 믿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면 우리 마음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죠.”

처음엔 부산과 같이 해변이 있는 관광도시이고 기후조건도 비슷한 원산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다 나중에는 함흥이나 신의주 등 북 전체로 수신인을 넓혔단다. 편지쓰기 전과 후의 변화를 묻자 그는 “쓰고 난 뒤에 북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고 그리움이 짙어졌다”고 답했다.

누군지 모르는 이를 향한 편지는 대부분 자기 삶의 한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자식 키우는 고충이나 살면서 당한 억울한 일도 있고 아름다운 해운대에서 사는 즐거움을 풀어낸 글도 여럿이다. 아들이 입대를 앞둔 이미경씨는 ‘94년 8월생 아들을 둔 당신께’라는 편지에서 ‘당신의 아들과 내 아들이 세계 군인 체육대회에 나간 남북단일팀을 총이 아니라 무지개빛 풍선이나 꽃을 들고 같이 응원하는 잠꼬대 같은 꿈을 꾼다’고 썼다. 전통 옻칠을 하는 석태호씨는 옻나무 재배의 이점을 밝힌 뒤 남북이 합작해 옻나무를 생산하자고 진지하게 제안했다.

이상석 선생은 “70년 넘은 분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뜻밖에 해결될 수도 있다”며 그런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편지쓰기는 중요하다고 했다. “(편지쓰기는) 말을 건네고 우리 안의 증오를 거둬내는 일이죠. 편지를 받는 사람도 저절로 증오를 거둘 겁니다.”

작년 개성공단 사무소 폭파 보고
“우리도 반성을” 편지쓰기 제안
130명 참여해 최근 편지모음책도
내달 북콘서트하고 전국운동으로

‘사랑의 매긴 성적표’ 저자
교사 퇴직하고도 글쓰기 모임 5곳 꾸려

한국에서 손편지는 이제 친밀한 사이에서도 보기 힘들다. 어떻게 손편지를 모았을까? “사실 한번 모여 (편지쓰기는) 이뤄질 수 없어요. 제가 퇴직하고 5년 넘게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회원들 글을 서로 보고 발표도 했어요. 이게 주춧돌이 돼 (편지쓰기) 분위기를 이끌었죠. 회원들이 쓴 편지를 제가 손닿지 않은 제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써볼 것을 권유하기도 했죠. 내 삶을 솔직히 드러내도 된다는 믿음이 서로 있을 때 편지쓰기는 이뤄질 수 있어요.”

그는 이번에 낸 책이 널리 읽히기를 절실히 희망했다. “책을 한 번만 읽으면 마음이 바뀔 겁니다.” 판문점 선언 3년인 내달 27일에는 부산에서 북 콘서트도 한다. “편지를 출력해 각각 봉투에 넣어 통일부에 전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편지들을 ‘보내지 않는 우체통’에 넣는 퍼포먼스도요.” 뜻이 맞는 각 지역 모임과 연대해 편지쓰기를 전국 운동으로 넓히겠다는 말도 했다. “만 명이 편지를 쓰면 도도한 흐름이 될 겁니다. 편지를 모아 토론도 하고 책도 계속 내야죠.”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소모임.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제공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소모임.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제공

그는 교사 시절에 아이들 글을 모아 책을 내기도 했고 재작년에는 글쓰기 공부에 대한 책인 <지금. 여기. 나를 쓰다>(2019)도 펴냈다. 왜 글쓰기 교육일까. “국어는 말하기, 읽기, 듣기, 쓰기 영역이 있어요. 듣기와 읽기는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육의 99%는 읽기 듣기입니다. 수능이 우리 교육을 좌지우지해서죠. 수능 문제가 다 읽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이 대학을 나올 때까지 자기 이야기를 속 시원히 써본 경험이 없어요. 자기 억울함이나 주장하고 싶은 것을 조리 있게 써내지 못해요. 한국 국어교육의 목표는 글쓰기 장애에서 아이들을 해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험이 억압하는 학교에서 글쓰기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처음엔 놀이로 시작해야 합니다. 진도와 관계없이 아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작해야죠. 진도 나가는 시간이면 학생들이 바로 반발해요. 글쓰기는 쉬운 놀이여야 합니다.” 그는 공업고 재직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나 식구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엉뚱하게도 ‘공업화학시험’이라는 시를 썼어요. ‘공업화학 시험 종이를 받았다./ 학번 마킹부터 한다./ 앞이 캄캄하다.// 내가 제일 먼저 찍고 엎드렸다./ 생각했다./ 기말 때 잘 해야지./ 중 1 때부터 이 생각했다.’ 이 시를 읽고 자기 절실한 이야기를 썼다고 제가 폭풍 칭찬을 해줬어요. 만약 엉뚱한 글을 썼다고 나무랐다면 아이는 바로 마음의 문을 닫을 겁니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한 식구라고 생각해야 글쓰기가 저절로 됩니다.”

그는 교사가 아이들의 느슨한 울타리로 설 때 글쓰기 교육도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고도 했다. “요새 아이들은 문자를 많이 해요. 1분에 수백타씩 치면서 자기 마음이나 생각을 표현합니다. 감수성을 키우거나 글쓰기 공부를 하기에 편하게 되었죠. 하지만 아이들은 지금 튼튼한 울타리로 자신들을 가두는 학교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자기를 드러내는 교육이 아니라 지식을 외워야 하는 수동적 교육을 받기 때문에 글이 나오지 않아요. 이럴 때 선생님은 아이들의 느슨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통 크게 어떤 시든 한 편 외우면 모두 동점을 준다고 선언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한테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믿음을 줘야 합니다. 이런 선생님들이 한두분 나올 때 세상이 바뀔 수 있어요.”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한테 수행평가 과제로 시를 아무거나 하나 외우라고 했어요. 아무도 관심을 안 보이더군요. 하지만 꼭 한 반에 한 명 정도는 외우는 아이가 있어요. 한 아이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는 안도현의 두 문장짜리 짧은 시 ‘너에게 묻는다’를 외웠어요. 제가 이 학생에게 에이 플러스를 주자 학생 모두 짧은 시를 찾더군요. ‘이렇게 짧은 시도 있구나!’ 하면서 시에 관심을 갖더군요.”

그가 교사 새내기였던 42년 전과 지금 학교의 글쓰기 교육을 비교해달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분위기가 엄청 달라 뭐라고 말하기 힘들어요. 그때는 미디어가 학급이나 복도 게시판이 유일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게시판을 안 봐요. 자기가 좋아하는 관심사는 뭐든 찾아볼 수 있어서죠. 하지만 아이들의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자랍니다. 저는 자연의 소리와 변화에 마음을 열게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봐요. 거기서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생겨 남의 사정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인간의 기본을 가르치는 교육이죠. 이런 교육의 모자람은 아이들을 시험으로 옥죄는 교육구조 탓이 큽니다.”

그는 89년에 창립한 전교조 울타리를 퇴직 때까지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전교조 퇴직 회원이다. ‘전교조를 위한 조언’을 구하자 먼저 유대계 폴란드 사람으로 나치에 희생당한 야누시 코르차크(1878~1942)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그분을 제일 존경합니다. 코르차크는 돌보던 아이들이 나치 가스실로 들어갈 때 자청해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갑니다. 실력과 가르치는 기술이 뛰어나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교사를 좋은 교사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저는 생각이 달라요. 좋은 교사는 아이들의 아픔을 보고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전교조가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냐고 하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교사가 될 생각을 했냐고 묻자 그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내 죄를 탕감하는 길은 교사가 되어 온몸을 아이들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거룩하게 꾸며서 대답하곤 합니다”며 웃었다. 그가 말한 죄란? “고등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았는지 몰라요. 깡패 비슷하게 놀았어요. 소견 없이 놀았죠. 그래서 원하는 대학에도 못 갔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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