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14일 소련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한-소 정상회담 뒤 악수를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91년 12월25일 소련 해체 이후 한반도에는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소련 해체 6일 뒤인 12월31일 남북은 판문점에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타결했다. 비핵화공동선언 채택과 북한의 국제핵사찰 수용 약속에 세계가 반겼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앞서 12월13일 체결됐다. 연말연시에 남북이 평화의 기쁜 메시지를 담은 연하장을 세계 각국에 돌린 것과 같았다.(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피스메이커>)
남북은 1991년 12월 탈냉전의 새로운 남북관계 발전 방향을 제시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하고도 한반도 평화체제를 실현하지 못했고 북핵 위기가 되레 악화됐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북핵을 둘러싼 북한과 한국, 미국 등의 ‘30년 게임’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소련 수교(1990년 9월30일)→남북 유엔 동시·분리 가입(1991년 9월17일)→남북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12월13일)→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합의(1991년 12월31일)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가 탈냉전의 시대 흐름을 읽고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넘어 평양으로 간다’는 북방정책을 추진한 결과였다.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5차 남북 고위급회담 모습. 이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통일부
30년 전 비핵화공동선언이 성사된 배경에는 소련 해체 움직임이 크게 작용했다. 1991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에 핵사찰 수용을 압박했으나 북한은 ‘주한미군 핵무기 철수’를 요구하며 맞섰다. 팽팽하던 대치 국면에서 뜻밖의 돌파구가 생겼다. 1991년 9월28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전세계 배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폐기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주한미군 전술핵무기 철수가 결정되자 남북 간 비핵화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그해 말 비핵화공동선언이 타결됐다.
노태우 대통령이 결재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국가기록원
부시 대통령은 왜 갑자기 전술핵무기 철수 선언을 했을까.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1991년 8월) 뒤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소련이 무너지고 어지러울 때 소련 핵무기들이 불량국가 손에 넘어갈 가능성을 크게 걱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를 막으려고 ‘전세계 배치 미국 핵무기 철수’를 선언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맞장구를 쳐서 소련 연방 내 15개 공화국에 분산 배치된 전술핵무기를 러시아공화국으로 집결시켰다.
비핵화공동선언은 북한이 이를 파기함으로써 선언에 그치고 있지만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그 이행과 준수를 요구하는 준거가 되고 있으며,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 규탄 및 제재 결의 때에도 중요한 근거로 되고 있다.(국립통일교육원 교육자료)
소련 해체는 1992년 8월24일 한-중 수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과 경제교류를 넓히면서도 국교 정상화를 한동안 머뭇거렸다. 1990년 9월 일찌감치 한국과 수교한 소련과는 매우 다른 태도였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주춤한 틈을 이용해 대만은 신생국들과 적극적으로 국교를 맺었다. 발트해 연안의 라트비아는 소련 해체 한달 뒤인 1992년 1월 독립했다. 이어 라트비아는 중국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2년 2월 대만과 수교했다. 중국 정부는 한국과의 수교에 박차를 가하고 한국에 대만과 단교하도록 압력을 가함으로써 대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마지막 외교 거점(한국)을 없애는 보복을 했다.(돈 오버도퍼, <두개의 한국>)
한-중 수교 이후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1992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임시사찰을 6차례 받았다. 1993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의 보고 내용 중 ‘중대한 불일치’를 지적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거세게 반발해, 1993년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1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다. 1994년 여름 미국은 북한 영변 핵시설 선제공격 일보 직전까지 갔다.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로 누그러졌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방북은 2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다. 방북 이후 미국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간주했다. 이후 3자회담, 6자회담 등 북핵 해결 노력이 이어졌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은 핵실험을 거듭하며 핵능력을 끌어올렸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촘촘해졌다.
1989~1991년 세계는 탈냉전으로 달려갔지만 한반도는 지구상 유일한 ‘냉전의 섬’이 됐다. 미-중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신냉전이란 말이 나올 만큼 한반도 주변 정세가 거칠게 출렁이고 있다. 남과 북이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란 과제를 슬기롭게 풀지 못하면, 한반도는 냉전의 굴레와 신냉전 굴레에 갇히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성기영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외교전략연구실장은 “미-중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내년 한국의 새 정부 출범과 미국의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북한은 한·미 양국에 대한 기대보다는 당분간 중국 의존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한-미 협력에 기반한 대북 관여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면서도 한-중 외교를 강화해 북한의 대화 복귀를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내년 새 정부는 남·북·미·중 4자회담을 제안해 중국이 비핵화 프로세스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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