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양자협의 불발땐 작업단계 더 높일듯
북한이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한·미·중 등 6자회담 당사국들의 움직임도 바빠지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4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쪽이 영변 현지에 나가 있는 미국 기술요원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한테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 작업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며 “북한은 일방적인 조처를 삼가고 현재 진행중인 검증 협상에 성실히 임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과 6자 회담 수석대표 양자협의를 위해 4일 베이징으로 떠났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북, 남북 6자 회담 수석대표 협의는 계획되거나 추진되는 게 없다”고 밝혔지만, 미국 쪽은 힐 차관보의 베이징행을 외교경로를 통해 북쪽에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주말 베이징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힐 차관보의 양자회동 성사 여부가 당분간 6자 회담의 기상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북-미 양자협의가 이뤄진다면, 북핵신고서 검증의정서 협상에 진전을 볼 수 있다. 반면에 김 부상이 베이징으로 나오지 않아 북-미 양자협의가 불발한다면, 북쪽이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에 필요한 작업의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이는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선 후자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미 양국은 일단 중유 등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등 과잉대응을 삼가며, 북쪽에 검증의정서 조기 합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대북 설득에 주력하는 쪽으로 대응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이 자신의 의무사항을 준수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우리도 반드시 의무를 지킬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북쪽은 불능화 작업을 통해 핵시설에서 절단하거나 제거해 창고에 보관해오던 장비들을 3일부터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 주변으로 옮겨놓고, 냉각탑 주변의 폭파 잔해도 치우기 시작했다고 유 장관과 정부 고위 당국자가 전했다.
북쪽의 이런 움직임을 두고 한-미 정부간 인식의 미묘한 차이도 불거졌다.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3일(현지시각) “영변 현지에 파견된 미국 요원들한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판단할 때 옮겨진 설비들을 재건하거나 복원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북쪽의 현재까지 움직임을 ‘핵시설 원상복원 작업’이라기보다는, 그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뜻이다. 이는 외교부 문태영 대변인이 3일 밤 “북쪽이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을 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힌 것과 뉘앙스가 사뭇 달라 논란이 일었다. 한 외교소식통은 “임기말 성과를 내려는 조지 부시 행정부와 대북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현 상황에 대한 시각차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제훈 박민희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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