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특별 기고 l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구호뿐인 정책이 상황악화 불러
북-일 협상, 북 개방 위한 기회삼고
한-일 군사협력, 공동안보 틀 지켜
‘평화 위한 다자간 협력’ 바탕으로
동북아 ‘의제 주도국가’로 거듭나야
구호뿐인 정책이 상황악화 불러
북-일 협상, 북 개방 위한 기회삼고
한-일 군사협력, 공동안보 틀 지켜
‘평화 위한 다자간 협력’ 바탕으로
동북아 ‘의제 주도국가’로 거듭나야
동북아시아가 격동하고 있다.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촉발된 한-일, 중-일 갈등의 격화와 일본 내각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의결, 북-일 협상의 급속한 진전,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방어(엠디·MD) 체계인 ‘사드’의 한국배치 검토 등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가히 ‘격동하는 동북아’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동북아의 격동을 몰고 온 사건들은 북-일 협상을 빼면 하나같이 평화를 위협하며 동북아 다자안보라는 시대적 과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들이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미-중 갈등만이 아니라 한-미 간에도 긴장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문제를 미-일 동맹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미국과 일본 군국주의 수탈의 역사적 고통에 근거해서 반대하는 한국 간에 군사적 이해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사드’ 한국 배치나 한국의 엠디 체제 편입 문제는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미-중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한편, 중국에게는 한국이 평화 이니셔티브를 행사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살펴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북-일 협상은 아베정부와 김정은 정권의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동북아 정세 완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미 정부는 북-일 협상이 유엔의 대북 제재 전선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만, 북한의 핵실험을 응징하기 위한 제재가 이미 실패한 마당에 하는 그런 걱정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오히려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아야 북-일 관계의 진전이 가능한 현실 조건을 고려하면 북-일 협상의 성공적인 진행은 그만큼 북한의 핵 실험 의지를 제어하는 효과가 있다고 봐야 한다. 북-일 관계의 진전은 북한의 개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제는 한국정부가 남북 대결 관점에서 북-일 협상을 기회보다는 도전요소로 인식하기 때문에 사물이 꼬여 보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존의 안보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사건들이 만들어 낸 격동하는 동북아의 한 가운데로 진입했다. 남북관계는 지난 6~7년 동안 불신과 대결이 누적되면서 갈등과 대립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는 연이은 북한의 핵실험과 핵보유국 선언 속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가닥조차 잡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 동북아 정세도 2013년 이후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중단될 정도로 갈등이 격화되어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의 저 끝자락에서 다자협력을 향한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한반도 평화가 표류하는 실루엣을 보며, 평화를 향한 한국의 이니셔티브가 신기루로 변했음을 느낀다.
그러나 암울한 미래로 가는 예약열차와 다름없는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다. 어렵지만 기존의 과제와 새로운 도전 요소들을 한반도 평화라는 전략 틀 속에서 배열하고 능동적으로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수행한 정책을 보았을 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난감하지만 그래도 난국을 극복해 갈 주체는 정부이기 때문에 몇 가지 고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현실을 직시하고 합리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미사여구의 정책모토만 있을 뿐 내용이 빈 정부 통일외교안보정책의 결과는 역설적으로 상황의 악화였으며 한반도 평화의 표류였다. 이제는 프로세스 없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평화를 실현할 구체적 프로세스를 만들고, 실현방도가 빠진 통일대박론에 어떻게(how to)라는 내용을 채우며, 공허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에 한반도평화체제 논의를 수혈해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남북 대결적 사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한-중 정상회담에서처럼 북 핵 포기를 위한 방법론은 뒷전으로 밀리고 이미 끝난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북 핵 반대를 위한 외교적 문구를 찾는 데 외교력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남과 북이 각각 중국에게 양손에 떡을 쥐어주고 그 크기를 비교하며 ‘선택’을 즐기도록 자진 상납하는 ‘현대판 조공’에 다름 아니다.
남북관계에서는 당국 간 대화를 대담하게 재개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5.24 조치를 해제하며 전면적인 남북경제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실패한 5.24 조치에 연연하는 것은 한국경제의 북방으로의 진출기회를 막고 장기적으로 남북공동체의 형성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조성할 것이다. 북한에게는 휴전선만이 아니라 북-중 국경이라는 또 하나의 경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핵문제에서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해 우선 북 핵을 동결하고 이어서 점차적으로 완전 폐기를 실현하는 단계적 접근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는 경제 제재를 통해 북한 핵을 포기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미국과 체제안전 담보 및 경제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핵을 포기했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나토군의 공습을 받으며 붕괴한 사건(2011년)을 계기로 북한의 핵보유 의지가 훨씬 강해졌다는 사실을 고려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6자회담 재개 및 지속 가동 → 북 핵 동결 → 북 핵 완전 폐기’의 3단계를 북한의 정상국가화(체제안전 및 관계정상화, 경제발전 실현)과정과 연동해 9·19 공동성명의 제반원칙에 기초해서 추진해 봄직하다.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국의 균형자·촉진자의 역할도 되살려야 한다. 무엇보다 동북아 다자안보를 추구하며 한·미·일 혹은 한·미 대 중국-북한이라는 기본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일 간의 정치외교 갈등 속에 어처구니없게 가장 본질적인 군사협력이 이루어지는 자가당착적인 모순은 빨리 극복돼야 한다. 강조하건데, 한-일 군사협력은 동북아 다자안보 혹은 공동안보 지향의 틀 내에서만 진행해야 한다. 배타적 한-일 혹은 한·미·일 군사협력은 동북아 긴장을 고조시키고 일본 군사력 팽창을 암묵적으로 방조하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북아 국가들은 오늘의 퇴행적 상황을 극복하고 다자 간 협력이 공동의 이익이 되는 시대로 나아가야 하며, 한국은 이를 위해 갈등보다는 공동협력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의제 주도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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