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에서 외교 각축전이 숨가쁘게 벌어지고 있다. 한·미·일 대 북·중이라는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각자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각개전투가 시작됐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동북아 각국은 다양한 전략들을 동원해 세력 싸움을 벌이고 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함이 만들어낸 북·일의 강력한 현상변경 시도,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가치 동맹에 맞선 중국의 과거사 연대 전략 등이 그것이다. 3일 동시에 열린 한-중 정상회담과 북-일 합의 내용 발표는 판이 흔들리고 있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각 국가들의 신경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각국의 생존전략을 두개의 키워드로 풀어본다.
① 북-일 현상변경 대 한-미 현상유지
■ 현상변경 vs 현상유지 북-일 교섭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현상변경’이다. 북·일이 4일 합의·공개한 북한 쪽의 일본인 납치자 특별조사위원회는 규모와 권한이 방대하고, 2000년대 초 고이즈미 정부 때와 달리 이를 전격 공개했다는 점에서 두 국가의 현상변경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를 방증하고 있다. 일본 내각의 지난 1일 집단적 자위권 보유 승인 역시 대표적인 현상변경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위기의식’은 중국의 국방비 지출이 일본의 3배를 넘어섰고, 결국에는 중국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지나 태평양 쪽으로 세력을 확대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됐다. 아시아에서의 우위 세력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면 결국 미국이 일본을 버릴 것이라는 인식이 일본의 현상변경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72년 일본에 아무런 사전통보 없이 중국과 외교관계 회복에 나설 때 충격을 받은 ‘닉슨 쇼크’를 ‘방기’의 사례로 제시한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은 북-일 교섭을 통해 외교적으로 몸집을 키워 일본이 만만치 않음을 중국에 보여주고 싶어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정세의 불안 요인으로 등장한 집단적 자위권 역시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집단적 자위권은 미-일 동맹 강화 측면이 있고, 장기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자국 방위력을 키워놓겠다는 의도”라고 풀이했다. 일본이 중국이나 미국처럼 확실하게 주도적인 독립변수가 아니기 때문에 서둘러 현상변경을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북한 역시 현상변경을 해야 할 강력한 욕구가 있다. 지구상에서 거의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미국과의 군사적 대립이라는 냉전 체제를 타파해야 안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핵실험 등 강압적 방법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북한은 일본과의 제휴를 통해 외부 자금 수혈과 외교적 고립 이미지 탈피라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과 미국은 현상유지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은 통일대박론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한과의 대결적 의식이 훨씬 강하다. 미국 역시 북한이라는 고리를 명분 삼아 중국을 압박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② 한-중 과거사 연대 대 한미일 가치동맹
■ 과거사 연대 vs 가치 동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번 방한 과정에서 한국을 과거사 연대의 틀로 끌어오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시 주석이 4일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이 과거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했던 사례로 임진왜란을 들면서 양국 국민이 “적개심을 품고” 일본과의 전쟁터로 향했다는 발언은 상당히 고강도 표현이다. 중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을 도와 함께 한·미에 대항해 전쟁한 것을 ‘항미원조’라며 정서적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다. 임진왜란은 이를테면 ‘항일원조’인 셈이다. 중국은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훼손 시도나 위안부 공동 연구 등에 대해서도 한국과 보조를 맞췄다.
중국의 과거사 연대는 미국의 ‘가치 동맹’에 맞서는 성격이 짙다. 오바마 행정부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에 기초한 ‘가치 외교’를 주창해왔는데, 이는 사실상 중국 정치·사회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중국 배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국의 전략에 호응해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5월 당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미 동맹이 안보동맹과 경제동맹을 넘어 이제는 가치동맹의 시대를 맞았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취임 직후인 2013년 1월 정기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세계 전체를 바라보며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 기본적 가치를 고려한 전략적 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중 관계 전문가는 “미국이 가치동맹을 통해 동아시아를 재구성하고 있고, 중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한국이 강하게 연루되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전략의 충돌 한가운데 한국이 놓여 있는 셈이다. 다만, 일본 정부가 북-일 교섭을 서두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미국과의 가치동맹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중국과의 ‘인문 연대’를 강조하고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미국과의 가치동맹에 여전히 강하게 묶여 있는 것과 비교되는 셈이다.
이용인 최현준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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