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10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퇴원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들어오면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극한 직업, 미국 대사
반미 게릴라가 노리는 몸값
‘장밋빛 침대’에서 잘 수만 없는…
반미 게릴라가 노리는 몸값
‘장밋빛 침대’에서 잘 수만 없는…
2012년 9월12일 새벽 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에서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은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미국 대사가 의식을 잃은 채 옮겨지고 있다. 스티븐스 대사는 결국 숨졌다. AFP 연합뉴스
흉기로 오른쪽 넓적다리 찔린
64년 에드윈 라이샤워 주일 대사
수혈 뒤 “내 몸에 일본 피 흘러”
일본 안심시켰지만 간염으로 고생 68년 과테말라의 존 메인 대사
79년 아프간 덥스 대사 등은
주재국 혼란 속에서 목숨 잃어
69년 브라질의 엘브릭 대사는
정치범과의 맞교환으로 석방돼 1974년 8월엔 로저 데이비스 주키프로스 대사가 부임한 지 6주 만에 반미시위 도중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미 대사관 앞에서 모여든 그리스계 시위대 300~400명은 미국이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을 좌시한다며 시위중이었다. 저격 배후는 한달 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리스계 우파 민족주의 성향 무장세력이라고 여겨졌다. 붙잡힌 피의자들은 기소 당시 살인 혐의가 아닌 불법무기 소지 혐의를 적용받았고, 5~7년 징역형도 감형받아 결국 1년반 만에 풀려났다. 미국 정부도 사건 직후 즉각 데이비스 대사의 후임자를 보내 사건을 축소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1968년 8월 내전중인 과테말라에서 숨진 존 메인 미국 대사는 최초로 국외에서 목숨을 잃은 대사였다. 그는 대사관으로 이동하던 중 ‘무장반군’(FAR) 소속 반군에 붙잡혔고, 탈출을 시도하다 등에 총탄 8발을 맞고 숨졌다. 주검은 수습되지 않고 한동안 길가에 방치됐다. 앞서 대사관의 무장요원들을 살해한 바 있는 이 단체는 애초 수감된 반군 지도자와의 맞교환을 요구하려 했으나 메인 대사가 도주하려는 것을 보고 총격을 가한 것으로 미 외교 당국은 보았다. 주재국과는 무관한 제3국에서의 정치 혼란으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1973년 3월 수단 하르툼에서 일하던 클리오 노엘 대사는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서 열린 행사 도중 들이닥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조직인 ‘검은 9월단’ 조직원 8명에게 납치당했다. 전근을 앞둔 조지 무어 미국 공사의 환송회였던 이날 행사에 참석한 노엘 대사와 무어 공사, 기 에이드 벨기에 공사, 압둘라 알말루크 사우디 대사, 아들리 알나세르 요르단 공사 등 모두 10명이 인질이 됐다. 인질범들은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수감중인 팔레스타인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를 거절하자, 노엘 대사와 무어 공사, 에이드 공사 등 서방 출신 3명이 살해됐다. 탈출용 비행기를 내달라는 요구가 묵살되자, 인질범들은 사흘 뒤 나머지 인질을 풀어준 뒤 수단 당국에 투항했다. 1976년 6월 레바논에서는 프랜시스 멜로이 미국 대사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소속 무장대원들에게 붙잡혔다가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1969년 9월 브라질에서 벌어진 버크 엘브릭 대사 사건은 납치한 미국 대사를 대가로 요구한 정치범 석방이 받아들여진 ‘성공’ 사례였다. 당시 엘브릭 대사는 좌파 게릴라 무장세력인 10·8 혁명운동(MR8) 세력에게 붙잡혔다가 학생·노동 운동가 등 15명과의 맞교환으로 78시간 만에 풀려났다. 무장세력은 납치 배경에 대해 브라질 군사정부의 민간인 고문과 수감 등 억압적인 국내 현실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가 터키 대사를 골랐다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미국 대사의 몸값’을 시사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풀려난 엘브릭 대사는 당시 사건을 돌이켜, “대사가 된다는 게 항상 장밋빛 침대 같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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