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를 방문한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접견하기에 앞서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 들어 역대 최악으로 치달아온 한-일 관계가 양국 국교정상화 50돌을 계기로 반전의 기회를 맞고 있다. 과거사 갈등의 파열음을 딛고 양자 정상회담 개최라는 관계 정상화의 꼭짓점까지 올해 안에 다다를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한-일 정상은 22일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상대국 대사관 주최로 열린 국교정상화 50돌 기념연회에 교차 참석했다. 나흘 전만 해도 “교차 참석은 어려울 것”(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라며 가능성을 사실상 부인했던 일이다. 한-일 관계에 극적 전환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 행보로 풀이된다. 양국 정상의 메시지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됐다.
“새로운 양국관계 원년되길 바래”
박 대통령, 원리주의적 태도 변화
중·일 접근속 고립 우려 커지고
메르스 등 국내 악재 돌파구 필요
아베도 “다음 반세기 향해” 화답
올 안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 촉각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일본을 방문 중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통해 아베 신조 총리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가) 새로운 양국 관계로 나아가는 원년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양국이 현안을 잘 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2013년 3·1절 기념사)이라던 이전 발언과는 달라진 뉘앙스다.
이에 아베 총리는 도쿄 총리 관저를 찾아온 윤 장관에게 “양국 국민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다음 반세기를 향해 관계를 개선·발전시키고 싶다”며 “반세기 전 오늘 일-한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양국 사이에 여러 과제와 문제가 있을수록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인해온 아베 총리의 과거사 역주행과, ‘과거사 사죄 없이 정상회담도 없다’는 박 대통령의 원리주의적 태도 사이에서 냉기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정상회담이라는 외교 수단마저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단일 과제에 종속시킴으로써 ‘스스로 손발을 묶는 자해 외교를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랬던 한국 정부가 이번에 급격한 기조 전환에 나선 배경으로는 크게 세가지가 꼽힌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2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아베 신조 총리와의 면담에 앞서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의 사진을 선물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먼저 최근 중-일 접근 속에 한국만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는 점이다. 한국은 과거사 문제에서 중국과 공동전선을 편다는 전략을 써왔다. 하지만 중-일은 각종 다자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주석과 아베 총리의 양자 정상회담을 두차례나 벌이는 등 관계 개선 모색에 나선 상황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 아닌 한국이 외톨이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 것이다.
더 주요하게는 한-미-일 삼각공조 구축을 서두르는 미국의 의도가 작용했으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2일 “도쿄와 서울 간에 막후 협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그 목표는 박 대통령의 방미 또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 이전에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전된)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은 분위기를 일신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한국의 관료들은 동일한 (한-일 관계 개선) 경로를 구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은 “이런 칼럼이 실린 뒤 ‘위안부 문제가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박 대통령 발언이 나오는 등 기류 변화 조짐들이 돌출했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은 지난달 말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4년 만의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 나서도록 한국의 등을 떠미는 등 한-일 관계 정상화를 재촉해왔다.
최근 들어 한-일 관계 경색 장기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지는 등 국내 여론 동향이 바뀐 것도 정부의 기조 전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고 메르스 사태 등 악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동북아 외교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 정부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이병기 비서실장의 역할론도 거론된다.
갑작스런 유턴이기는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뒤늦게나마 한-일 관계 기조 전환에 나선 것 자체는 다행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이렇게 더 악화 국면을 끌고 가서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판단에 따른 궤도 수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깜짝 전환이 위안부 문제 등 각종 쟁점에 대한 일방적 후퇴나 미봉으로 귀결돼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다. 스스로 묶었던 외교 수단을 풀겠다는 의지를 비친 만큼 치밀한 준비로 정상회담 등을 현안 해결 통로로 적극 활용해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제대로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며 “한-일 관계 정상화까지는 앞으로의 과정이 더 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손원제 석진환 기자, 도쿄/길윤형 특파원
won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