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한말과 현재의 한국의 달라진 위상을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되는 비유가 바로 ‘새우와 돌고래’다. 100년 전 강대국 고래들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대다가 등이 터져버린 새우 같은 조선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는 그 사이를 헤엄치는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괄목할 만한 성취에 대한 감성적 만족감을 고양시켜주면서도, 여전한 초강대국들의 세력 경쟁에 대한 현실적 진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비유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과연 대형 고래들의 바다에서 생존을 넘어 번영과 평화를 이루는 영리하고 기민한 돌고래임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다.
돌고래가 가리키는 현실외교의 지점은 중견국가 또는 강중국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개념이 ‘중간의 어느 지점’으로 정확한 규정이 어렵다 보니, 경제 규모나 인구, 영토 등 사이즈가 부각된다. 5천만 인구를 가진 한국이 민주화와 세계 15위권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이후 약소국의 생존외교를 탈피하는 것이 외교의 중심 과제라는 논리다. 또한 냉전 종식 역시 큰 배경을 구성하는데, 미-소 냉전의 틀 속에서 생존에만 올인했지만, 이제는 역량과 환경 모두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최초로 한반도를 벗어나 동아시아 공동체의 기치아래 강중국 외교를 표명했으며, 노무현 정부는 동맹외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균형자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공히 소수정권으로서의 한계와 미국 네오콘 정부의 압력으로 북핵 위기와 한반도 전쟁 방지를 위해 온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약소국 외교의 한계를 다시 노정했다.
이에 비해 이명박 정부는 다수 정권이라는 나은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었고, 좀 더 우호적인 대외환경에서 ‘글로벌 코리아’라는 강중국 외교를 모색하였다. 주요 20개국(G20)과 핵안보 정상회의 및 국제기구 유치와 해외 공여의 활성화 등은 나름의 성과였다. 외연 확대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어졌으며, 2013년 9월 출범한 중견국협의체(MIKTA·믹타)는 박근혜 정부가 자랑하는 “책임 있는 중견국 외교”의 성과물이다. 하지만 이는 외양의 유사성에만 치중할 뿐, 문제를 공유하거나 공동 이익의 접점을 찾기 힘든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대북 봉쇄와 친미 일변도의 진영 외교를 지속한다는 점에서 치명적 약점을 내재한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문제의 안정화 없이 한국의 중강국 외교는 불가능하다. 동맹 네트워크의 부활을 통해 중국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을 추종하는 한 주변화되고, 종속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북유럽 국가들이 냉전기부터 대표적인 중강국으로 불린 가장 큰 이유가 동맹 정치로부터의 일정한 거리 유지였다. 또 독일의 경우도 대표적 중강국으로 등장한 것이 단지 ‘사이즈’ 때문이었다면, 훨씬 이전부터 가능했을 것이다. 새우가 사이즈를 키워 대왕새우는 될지라도 돌고래는 될 수 없다. 보수 정부 7년 반 동안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로 가자는 구호는 미국을 빌려 화려한 외양만 키우는 약소국의 변형된 편승 외교이자 ‘호가호위’에 불과하다.
강중국의 외교는 다양한 옵션과 유연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 해결 능력은 없이 미국에만 기대고, 북한과 일본 탓을 하며 안보 공포를 자극하는 단순한 외교는 약소국의 전형적 외교일 뿐이다.
미국 외교관 리처드 홀브룩은 외교를 두고 테마는 한 가지, 그러나 변주는 끊임없이 가능한 재즈와 같다고 했다. 그렇다! 국익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수많은 변주를 할 수 있는 유연한 외교가 강중국 외교다.
김준형(한동대 교수·국제정치)
김준형(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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