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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배신 당한 고종 황제의 짝사랑…‘새우 외교’의 비극

등록 2015-08-13 21:57수정 2015-08-17 08:12

[광복·분단 70년 - 다시 쓰는 징비]
⑤ ‘강중국’ 걸맞은 ‘외교 전략’ 짜자
※ 강중국: 1인당 국내총생산 2만달러 이상 등 강국의 조건을 갖춘 인구 5000만~1억 사이 중형국가. 같은 조건으로 인구 1억명 이상은 강대국, 5000만명 이하는 강소국으로 분류한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러-일 강화조약이 시작됐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원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될 처지에 내몰렸다. 고종은 친한파 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보냈다. 회담 참가를 요청했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축했다. 이미 미국은 한달 전인 7월27일 도쿄에서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터였다. 가쓰라 다로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 간에 미-일이 서로 한반도(일본)와 필리핀(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고종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로 믿고 여러 차례 도움을 청했다. 열강 각축과 편짜기 속에 고종의 짝사랑은 외교 실패와 망국으로 이어졌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은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무능 외교, 열강들에 휘둘린 ‘새우’ 외교의 비극을 웅변한다”고 말했다.

20세기 동아시아와 태평양은 거인들과 고래들의 판이었다. 청과 중국, 러시아와 소련, 일본, 미국…. 대국과 강국들이 이곳의 패권을 다투며 명멸했다. 등 터지는 건 한국과 대만, 류큐(오키나와), 몽골, 베트남 같은 새우들이었다.

광복·분단 70돌의 해 다시금 동아시아에 고래들의 충돌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 미-중 패권 다툼 가능성이 부상하는 가운데, 일본 또한 우경화와 재무장의 항로로 질주하고 있다. 한국을 짓눌러온 ‘새우 콤플렉스’도 꿈틀거리고 있다. 강대국에의 의존, 수동적인 편승 또는 추종이 국가 생존 전략으로 외쳐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선 새우 처지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변화한 국제 정세와 달라진 한국의 국력을 정확하게 파악해 그에 걸맞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국가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한말 열강에 등 터지던 ‘새우’
종합 국력 세계 9위 중견국 부상
강대국 의존성 벗고 주도력 갖춰야

한국의 주도성이 강조되는 새로운 전략이 ‘돌고래’라는 구체적 표상으로 투영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성장한 한국의 국가 전략을 빠르고 힘찬 돌고래의 유영으로 표상하는 주장은 이제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강중국 또는 중견국으로 부상한 한국의 위상과 그에 부합하는 능동적 행위 전략의 필요성을 감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70년 전 광복·분단 원년에 견줘 기적과도 같은 국력 성장을 이뤘다. 지난해 보수 성향의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주요 20개국(G20)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의 종합 국력은 세계 9위로 평가됐다. 미, 중이 각각 1, 2위를, 일본은 8위를 차지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한국은 더 이상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라고 평가했다.

강중국으로 떠오른 한국의 국가 전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전문가들은 크게 미-중 관계와 한-중, 한-일 관계, 남북관계 등의 영역에서 한국이 숨 쉴 공간을 최대한 넓히려는 대담하고도 주도면밀한 외교력의 발휘가 요구된다고 본다. 현재 미-중 경쟁은 동아시아 정세의 가장 큰 규정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의 선택 하나하나에도 이미 돌발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개발투자은행(AIIB) 참여, 미국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의 한반도 배치 등을 둘러싼 논란이 이를 입증한다. 오는 9월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항일승전 70돌 기념 열병식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느냐도 미-중 경쟁 구도의 영향을 피해가지 못한다.

한국이 달라진 위상에 상응하는 자유롭고 유연한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스런 대목이다. 한국을 붙들어매는 미국의 자력은 ‘중국보다는 미국’이라는 보수층의 전통적 관념과 결합해 여전히 강력하다. 앞으로 최대 교역국 지위를 앞세운 중국의 압박 또한 그에 비례해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그 대응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일부 전통적 성향의 전문가 그룹에선 흔들림 없는 한-미 동맹의 유지 강화를 강조한다. “한-미 동맹이 북한의 도발을 실효적으로 억제하고 자유민주적 평화통일을 추동하는 전략적 지렛대”이며 “대중·대일 관계의 협상력을 제고하는 전략적 자산”(윤지원 평택대 교수)이라는 시각이다. “급성장한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미국과의 동맹을 변화시켜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어느 편에 설 것이냐’를 강요받는 상황이 잦아질수록, 한국이 독자적으로 헤엄칠 공간을 확보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본다.

동아시아 안보 지형과 한국 안보의 7대 도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돌고래 전략’ 남북관계서 더욱 절실…전작권 환수 첫손 꼽혀

한-미 동맹이냐 미-중 균형찾기냐
어느 편에 쏠리기보다는
국익 관점서 ‘숨 쉴 공간’ 넓혀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사드 등
선택 강요 받을수록 독자 영역 절실

동아시아 공존의 허브로 나아가려면
면밀하고 담대한 외교 필요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은 “지금은 중국을 왼 날개, 미국을 오른 날개 삼는 ‘양 날개’ 균형 전략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편승하기보다, 주체적으로 국익의 관점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설사 미국이 부정적일지라도, 한-중 관계와 한-일 관계를 고려하면 중국 열병식에 가는 것이 맞는 선택”이라고 했다.

한국은 미, 중 어느 한쪽에 안주하기보다 상황에 따라 ‘명석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정재호 서울대 교수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의 미래>)는 제안도 같은 흐름에 있다. 이른바 ‘명민 외교’다. 동맹 미국과도 이해 상충이 가능하다는 점을 직시하고 한국의 국익 가치에 기반한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가령 1994년 미국 대통령이 친서를 보냈음에도 싱가포르는 절도 혐의를 받은 미국인에게 태형을 실시했다. “자국의 가치 수호라는 현안에 대한 일관적 입장을 표방”함으로써, 싱가포르는 “(미-중) 양 강대국의 구도 속에서 자생적으로 호흡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빠른 판단에 기반한 선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 6월 한 강연에서 “사드 배치 문제는 정부가 이게 문제가 될 거라고 봤으면 처음에 미국이 말을 못 붙이게 딱 끊었어야 했다. 한반도 안정을 위해 이건 안 된다고 했으면, 미국도 (더는) 말 못 꺼낸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열 수 앞을 보고 움직이는 노회한 대국이다. 틈을 주면 계속 밀고 들어온다. 엔시엔디(NCND)나 신중론, 이렇게 가면 결국 미국이 의도하는 트랙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

미·중 어느 일방에 쏠리지 않으면서, “한국이 동아시아 협력과 공존의 허브형 가교”(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로 기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등거리 균형 외교를 넘어 미·중을 모두 끌어들일 수 있는 협력의 장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돌고래로 표상되는 강중국 한국의 주도성과 능동성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 특히 남북관계와 북한 핵을 비롯한 대북 정책에서 가장 탁월하게 구현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은 ‘돌고래 전략’으로 이를 명명했다. 그는 지난 2월 한 강연에서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관련국들은 대북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의지나 여유가 없을 것”이라며 “세계 10위권인 한국이 이제는 나서서 리더십을 발휘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대북 ‘관여’ 정책을 추진해 주변국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문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 극복의 과제에서부터 돌고래 한국의 강한 주도력이 발휘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맹국과 주변 강대국과의 이해 충돌 가능성을 좁히고 조율하는 능력 못지않게, 한국의 핵심 국익인 분단 극복을 향해 때로는 주변의 ‘비토’를 건너뛸 수 있는 강력한 의지와 이 의지를 뒷받침할 보장 장치 또한 요구된다. 무엇보다 한국의 군사주권을 제약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작전권 없이는 북핵 해결과 통일의 길을 열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한국 주도의 통일 시 미군 통제하의 한국군이 한-중 국경을 지키는 상황을 중국이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작전권을 가진 온전한 군사력 없이는 대북관계는 물론 통일을 위한 주변국 외교에서도 힘이 빠진다”는 명백한 현실 때문이다. 군사주권은 돌고래 한국의 물리적 기초를 이룬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명(明)이라는 거대 동맹에 국가 운명을 전적으로 내맡겼던, 통치자를 필두로 한 조선 사대의존파의 무책임과 자강 없는 동맹 의존이 불러올 비극을 경계했다.

광복·분단 70돌의 해에 자강과 동맹의 이분법을 넘어 공존 가능한 공통의 이익을 앞장서 추구하는 강중국 한국의 유유한 유영을 떠올린다. “작지만 빠르고 영리한”(신기욱) 돌고래의 꿈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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