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처가 최우선돼야 한다.”
북한의 4차 핵실험(1월6일)과 로켓 발사(2월7일) 이후 ‘북핵 문제’를 다루는 박근혜 정부의 최상위 슬로건이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든 촌보의 변이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일관성이 있다.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23일 정례 브리핑에서 “오늘 아침 9시30분께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이용해 북한 인민무력부 명의의 대남 전통문에 답신을 발송했다”며 “북핵 문제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군사회담을 제안한 데 유감을 표명하고 비핵화에 대한 북쪽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북한 인민무력부가 21일 군 통신선을 이용해 “조선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쌍방 사이의 군사적 신뢰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북남 군사당국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을 5월말 또는 6월초에 편리한 날짜와 장소에서 가지자”고 제안한 데 대한 사실상의 ‘거부’ 답신이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도 같은 시각 정례브리핑에서 똑같은 내용을 거듭 강조했다. 문·정 대변인은 입을 맞춘 듯,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제7차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남북 군사당국회담 필요성”을 강조한 뒤 봇물 터진 듯 이어지는 북쪽의 군사당국회담 제안을 “위장 평화 공세”라고 치부했다. “우리 내부를 분열시켜 남남갈등을 조장하며 국제사회의 국제 제재 공조의 균열을 기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회담을 제안하며 ‘핵’을 의제로 적시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진정성이 없는 대화 공세”로 볼 여지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정부의 이런 태도는 아쉽다.
다른 선택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는 남북 군사실무접촉에 나가서 군사당국회담의 주의제로 핵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북쪽이 받으면 좋고, 거절해도 남쪽이 추가로 손해볼 일은 없다. ‘북쪽 대화 제안-남쪽 거부’ 상황과 ‘북쪽 회담 제안→남쪽 수용, 비핵화 논의 역제안→북쪽 거절, 회담 결렬’ 상황 가운데 어느 쪽이 국제사회에 협력을 호소하는 데 더 나을까? 더구나 북쪽의 회담 제안을 계기로, 2월10일 북쪽의 일방적 조처에 의해 전면 차단된 군 통신선 등 남북 비상연락체계를 재가동할 기회의 창이 열렸다. 이를 회담 즉각 거부로 다시 닫히게 할 이유가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를 빼놓고는 단 한 번도 ‘대화’를 먼저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심지어 외교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 2270호 채택 관련 보도자료에서 결의 49항(한반도·동북아 상황의 평화적·외교적·정치적 해결)과 50항(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 지지 재확인)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대북 제재 다걸기’말고는 그 어떤 것도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원칙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이 경계하는 ‘근본주의’다.
협상은 나약함의 징표가 아니다. ‘외교의 아름다움은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상대방의 전략을 바꾸는 데 있다’는 국제 외교가의 오랜 격언을 박근혜 정부가 잊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제훈 기자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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