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이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분쟁 관련 판결이 나온 12일 최신 052D형 이지스함 한 척을 남중국해에 추가 배치했다. 연합뉴스
2013년 1월22일 필리핀 정부의 제소로 시작된 남중국해 분쟁 관련 국제 상설중재재판소(네덜란드 헤이그 소재)의 판결에 대해 정부가 13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 형식의 공식 반응을 내놨다. 판결은 12일 오후 6시(한국시각), 외교부 대변인 성명 발표는 13일 오전 10시30분에 이뤄졌다. 공식 반응이 나오기까지 16시간30분이 걸렸다. 미국과 중국, 필리핀·베트남·대만 등 동남아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남중국해 분쟁이라는 고차함수를 앞에 둔 정부의 고민의 깊이를 방증한다. 아무도 입에 올리진 않지만,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한 국제 사법기관의 첫 판결인 이 재판 결과가 독도를 둘러싼 한국-일본의 갈등에도 불똥을 튀길 여지를 배제할 수 없어 정부의 고민이 더 깊다.
외교부 대변인 성명은 단 두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표현도 아주 추상적이다. 첫 문장은 이렇다. “정부는 주요 국제 해상교통로인 남중국해에서의 평화와 안정, 항행과 상공비행의 자유가 반드시 보장돼야 하며, 남중국해 분쟁이 관련 합의와 비군사화 공약, 국제적으로 확립된 행동규범에 따라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해왔다.” 기존 공식 견해의 되풀이다.
주목할 대목은 둘째 문장이다. “정부는 7월12일 발표된 중재재판 판결에 유의하면서, 이를 계기로 남중국해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이 문장의 ‘평화적 해결 기대’도 정부가 줄곧 밝혀온 공식 견해다. 하지만 판결 결과를 “유의”(take note)한다는 표현은 주목해야 한다. “지지” 또는 “존중”한다는 표현과 많이 다르다. ‘유의’란 가치 판단이 담겨 있지 않은 외교용어다. 재판 결과가 “무효이고 구속력이 없다”는 중국 정부는 물론, “최종적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는 미국 정부의 반응과도 결이 다르다. “유의”라는 표현을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는 문구와 겹쳐보면 외교정책적 맥락이 좀더 분명해진다. 이번 판결이 분쟁 격화로 비화할 도화선의 위험이 있으니, 사법적 절차에만 의존하지 말고 ‘외교협상을 통해 창의적으로 공존공생의 출구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의 격한 대립·갈등 와중에 운신 공간을 확보해야 할 한국 정부의 곤혹스런 처지가 어른거린다.
정부의 이런 반응은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해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기대·압박해온 맥락과 거리가 상당하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한테 요청한 유일한 한가지는, 우리는 중국이 국제규범과 (국제)법을 준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그런 면에서 실패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미국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이라며 공개적으로 ‘줄서기’를 압박한 바 있다. 미국이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이런 신중하고도 모호한 반응엔 미-중 갈등 사이에서 균형잡기뿐만 아니라 이번 재판 결과가 일본의 독도 도발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케시마(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가 독도 문제를 중재재판소로 끌고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다만 법리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 등을 두루 고려해야 해 일본 정부가 적어도 현재로선 중재재판소에 제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남중국해 분쟁) 판결의 내용과 (독도 문제와 관련성 여부에 대한) 법적 함의 등에 대해서 정부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할 예정”(12일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독도 관련 정부 공식 견해는 “독도는 역사·지리·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 영토로 외교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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