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연쇄 정상회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러시아·중국·라오스를 차례로 방문해 미·중·일·러 정상과 회담했다. 북한을 뺀 6자회담 당사국 모두와 양자 차원의 정상회담을 며칠 사이에 소화한 것이다. 2일 박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전에 비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부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주한미군 배치’ 방침을 둘러싼 갈등에도 중·러 정상한테서 ‘북핵 불용’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결의 2270호 이행 의지’를 확인한 것 등을 성과로 꼽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후(현지 시각) 라오스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정상회담에 참석해 있다. 비엔티안/청와대사진기자단
과연 그럴까? 사드 갈등은 미-중, 한-중, 한-미, 한-러 정상회담을 거치며 그간의 갈등 구도가 각국 정상의 입을 통해 재확인됨으로써 오히려 악화하는 분위기다. 반면 통제불능 상황으로 치닫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제어할 방안과, ‘안보 딜레마’에 빠져 날로 위태로워지는 동북아 정세를 공존·협력의 방향으로 전환할 실마리를 찾는 데에는 각국 정상이 많은 에너지를 쏟지 못했다. 한·미·일 정상이 한목소리로 강조한 ‘더 강하고 촘촘한 대북 제재·압박’은 중·러의 소극적 태도에, 중·러 정상의 ‘6자회담 복원,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 호소는 한·미·일 정상의 모르쇠에 부닥쳤다. 서로한테 소귀에 경 읽기를 하는 형국이다.
출발부터 위태로웠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박 대통령과의 회담(3일 블라디보스토크) 전후로 언론 앞에선 ‘사드’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비공개 회담에선 사드 반대 뜻을 밝혔다. 북핵·미사일 대응 문제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상황을 협상 국면으로 돌려야 한다”고 했다.
한-중 정상회담(4일 항저우)은 정면충돌에 가까웠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중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한-중 관계를 원만히 풀어가기엔 현안에 대한 인식과 해법이 너무 달랐다. 박 대통령이 “사드는 제3국(중국)의 안보 이익을 침해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강조하자, 시 주석은 “미국의 사드 한국 배치에 반대한다”고 맞받았다. 사드는 북핵·미사일 방어용이 아닌 미국의 중국 견제용이라는 인식이다. 시 주석은 사드 배치 대신 6자회담을 복원해 북한의 ‘관심사’(안보 우려)까지 고려해 “균형있게” 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강력하고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다. 평행선이다.
박 대통령은 시 주석을 만난 다음날인 5일 라오스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한목소리로 ‘사드 배치 강행’을 선언했다. 특히 한·미 정상이 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에서 대북 억지력의 하나로 “확장 억제”라는 표현을 쓴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확장 억제란,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고도 본토와 아태지역에 전개한 전략자산을 중심으로 한 ‘핵우산’을 한국에 제공한다는 뜻이다. 뒤집으면 ‘미국이 보호할 테니 한국은 핵무장은 꿈도 꾸지 마라’는 전략적 견제이기도 하다.
아울러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의 미사일방어(MD) 협력, 즉 사드는 북한의 위협을 방어하고 억지하려는 순수한 방어체제”라고 강조했다. “사드 배치는 동북아의 전략적 균형을 훼손한다”는 중·러 정상의 반대를 반박한 것이다.
이로써 ‘사드 주한미군 배치’를 두고 한·미의 ‘사드 배치 강행’ 대 중·러의 ‘사드 배치 반대’가 각국의 정상 차원에서 공식 확인된 셈이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미·중·러의 대치·갈등은 정상 차원의 ‘전략적 대타협’이 없이는 풀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더구나 한-미 정상회담 뒤 오바마의 ‘복심’으로 불리는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부보좌관은 언론 브리핑에서 “중국이 제재를 강화하더라도 사드 배치 방침을 재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북한이 탄도미사일과 핵프로그램을 포기”한다면 재검토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에 엠디망을 구축할 때도 ‘이란의 미사일 위협’을 빌미로 삼았는데, 이란 핵협상이 타결된 뒤에도 엠디망 구축을 중단하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실제 표적은 이란이 아니라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중·러 정상이 유럽 엠디와 아태지역 사드를 동일선상에서 다루는 이유다.
로즈 부보좌관은 기자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오바마 대통령과 박 대통령이 우리 3개국(한·미·일)의 3각 (안보) 협력을 지속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했다는 사실”이라며 “우리는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보여준 진전과 리더십을 환영한다”고 강조했다.
사드 논란의 와중에 이건 무슨 소리일까? 북한의 4차 핵실험 다음날인 1월7일 오바마 대통령이 박 대통령과 전화통화 때 한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엉뚱하게도(?)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12·28 합의가 “정의로운 결과”이며 “북한 핵실험이라는 공동의 도전에 대한 한·미·일 간 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리고 7일 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12·28 합의의 모멘텀을 살려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과 “한·미·일 3국의 공조 강화”를 추구하겠다고 천명했다.
요컨대 한국 사회를 극도의 갈등에 빠뜨린 12·28 합의와 사드 배치 결정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솜씨 좋은 전략가가 빚은 ‘쌍생아’다. 한·미·일·중·러 정상의 연쇄 회담이 드러낸 동북아의 속살이다.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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