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뒤 정부직 삼가야’ 권고 외면
대선행보 강행하다 지지율 추락
총장직 성과 상처…가족비리 들춰져
실리외교 필요한 한국에 불행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한 직후인 1일 오후 취재진이 반 전 총장의 사무실이 입주한 서울 마포구 도화동 건물 입구에서 반 전 총장을 기다리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g555@hani.co.k
분열된 한국사회를 대통합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시청률 저조로 조기 종영하는 실패한 단막극으로 막을 내렸다. ‘외교’에서 살길을 모색해야 할 한국사회와 개인 모두에 뼈아픈 손실이다.
전례 없는 모험이었다. 역대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 임기 종료 뒤 바로 국내 정치판에 뛰어든 전례가 없다. 4대 사무총장인 쿠르드 발트하임이 1996년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됐지만, 실권을 지닌 총리가 따로 있는 사실상의 명예직인 데다 ‘퇴임 뒤 5년’이라는 휴지기를 거쳤다. 그러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임기 종료(2016년 12월31일) 전부터 ‘대선 출마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유엔은 창립 직후 ‘수석행정직원’(유엔헌장 97조)인 사무총장의 퇴임 뒤 ‘정치 활동’을 제어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46년 1월24일 제1차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 11(Ⅰ)호’가 그것이다. “유엔 회원국은 사무총장의 퇴임 직후 어떠한 정부직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무총장 자신도 그러한 (정부) 직책을 수락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권고가 핵심이다. “사무총장은 많은 (유엔 회원국) 정부의 기밀을 공유하는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사무총장이 보유한 이런 기밀 정보가 많은 정부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이 결의의 정신을 외면했다. “저의 선출직과 관련된 정치적 행보를 막는 조항은 아니다”(1월12일 귀국 회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귀국 직후부터 전국을 돌며 ‘대선 캠페인’에 나섰다. 언론과 정치권의 ‘검증’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역량과 성과 여부는 물론 가족 비리까지 까발려졌다.
반 총장은 1일 불출마 선언에서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됨으로써 결국은 국민들에게 큰 누를 끼쳤다”고 말했다. ‘조기 종영 단막극’의 후과는 크다. 반 총장이 40년 가까이 몸담은 외교부의 한 간부는 “반 총장 개인에게나 한국사회에나 매우 불행한 사태”라고 말했다. 나라 안팎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국제 지도자라는 국가적 자산을 잃었기 때문이다. 외교부의 다른 관계자는 “어차피 안 될 길, 지금이라도 멈춘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며 “반 총장이 하루빨리 심신을 추슬러 한국사회가 직면한 외환에 대처하는 데 원로로서 힘을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 총장도 불출마 선언에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경험과 국제적 자산을 바탕으로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든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초당파적 원로로 한국사회가 나아갈 길을 조언하고 국제사회에서 역할을 하기엔 귀국 이후 20일 만에 너무 많은 ‘때’를 몸에 묻혔다. 반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에서 언론과 정치권의 ‘검증’을 “인격 살해에 가까운 모해, 각종 가짜 뉴스”라 맹비난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작품’이라 불리는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출신으로서 ‘초당파적 원로’로 거듭나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 과정에서 반 전 총장의 자기 성찰은 필수라는 게 외교가의 고언이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37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