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러시아 지도자로는 11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신조 총리가 도쿄의 고도칸 유도연구소를 방문해 환담을 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파기, 기후변화협약 탈퇴 등을 비롯해 오바마의 외교정책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폐기처분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세계경영 전략의 핵심으로 러시아를 지렛대로 중국의 ‘대국굴기’를 막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는 점에서 미·중·러 3자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해왔다. 트럼프는 2016년 7월 <폭스뉴스>의 시사 토크쇼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수없이 들었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미-중, 미-러 관계는 크게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트럼프 정부가 추구하는 변화보다는 그로 인한 혼돈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나토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동유럽 국가들은 혼란을 겪었다. 나토로부터의 안전보장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어떤가? 트럼프는 이른바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을 내세워 추진한 재균형 전략 및 아시아 중시 정책만큼은 이어받을 것인가? 분명치가 않다. 스스로 내걸었던 정책 방향인 러시아와의 연대, 중국 견제도 실종 상태다. 러시아 스캔들로 탄핵마저 거론되며 러시아와의 연대는 불투명해졌고, 4월 미-중 정상회담은 중국 견제라는 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9월 아베 신조 총리가 도쿄를 방문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악수로 맞이하고 있다.
일본과 인도의 독자 외교
이로 인해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에서도 오바마의 재균형 전략을 바탕으로 형성된 동맹과 연대가 흔들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핵위협과 중국 견제를 위한 지렛대인 사드에 갇힌 채 동맹 강화의 충성을 다짐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과 인도는 제 갈 길을 모색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6년 5월 러시아 휴양지 소치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것은 그의 소신을 보여준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러-일 협력관계의 복원과 북방 4개섬 문제에서의 돌파구를 자신 재임 중의 외교적 목표로 분명히 한 바 있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소치에서의 정상회담을 반대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 정상회담에서 러-일 관계 정상화와 쿠릴열도 문제를 풀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그 뒤 2016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2차 동방경제 포럼에서의 정상회담을 거쳐, 푸틴 대통령이 2016년 12월 러시아 정상으로서는 11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해 돈독한 관계를 다졌다.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2017년 4월 아베 총리가 다시 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러-일 간 정상외교는 두 나라 간 경제·통상 관계를 확대하고 극동·시베리아 개발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평화조약 체결을 목표로 한 러-일 관계 정상화는 오바마 대통령이 강화하고자 한 미국 주도의 전후질서인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한 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2월 가장 먼저 첫 정상회담을 했지만, 미국의 그늘에 있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교도통신>은 6월10일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시진핑 국가 주석을 내년 하반기 중 국빈 초청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아베 총리가 이를 위해 내년 상반기 중국을 방문하는 방향으로 중국 쪽과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시 주석의 방일이 성사되면 2008년 후진타오 이후 10년 만에 중국 정상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된다. 6월5일 아베 총리는 한 강연에서 중국의 일대일로가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지역을 연결하는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며 “(일대일로에) 협력해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 6월8일 카자흐 아스타나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 앞서 시진핑 주석이 보좌진이 뒤늦게 오는 바람에 혼자 푸틴 대통령 일행을 맞았다. 푸틴 대통령이 혼자 앉은 시 주석을 보면서 ‘외로운 전사’라고 농담을 건넸으나 러시아어를 모르는 시 주석은 어색하게 웃었다고 한다.
모디 인도 총리 만나 협력관계 밝힌 시진핑
인도 역시 중국과의 관계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또한 중국이 추진해온 남중국해 등 대양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상징하는 이른바 ‘진주 목걸이 전략’을 견제하기 위해 구축했던 미국의 대중 해양 봉쇄의 한 축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7년 6월9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인도의 상하이협력기구 가입을 계기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중국 외교부 등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은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재 국제정세에서 세계 최대 개발도상국으로서 중국과 인도는 더 많이 협력해야 한다”며 “중국은 양국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시 주석의 상하이협력기구 가입 축하 인사에 대해 “인도가 가입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중국에 감사하다”며 “양국이 이를 통해 협력을 강화하고, 핵심적인 우려에 대해 상호 존중해 적절히 이견을 해결해 나가길 원한다”고 화답했다.
일대일로 구상의 핵심 요소인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CPEC)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를 통과한다. 인도는 이 계획에 반대해 5월 일대일로 정상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가 반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동부 인도, 특히 웨스트벵골주 콜카타는 일대일로의 6대 회랑 가운데 하나인 BCIM(방글라데시?중국?인도?미얀마)에 속해 있다. 이 회랑은 중국의 윈난성, 방글라데시, 미얀마 및 웨스트벵골주를 육로, 철도, 수로, 항공로를 통해 연결해준다. 인도의 ‘일대일로’ 불참은 서남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통로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9월18일 취임 뒤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한 시진핑 주석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상하이협력기구와 유라시아 중심지대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의 미·중·러 3자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4월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앞으로 열릴 중-러, 미-러 등 서로 교차하는 양자회담을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날 것이기에 현재로선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중-러가 정상 간 접촉을 통해 협력관계를 굳건히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푸틴과 시진핑 두 정상은 5월 베이징 일대일로 정상회담, 6월 아스타나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담 등 다자회담에 이어 7월3~4일 시진핑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연다. 한달에 한번꼴로 만나는 셈이다. 푸틴 대통령은 아스타나의 상하이협력기구 회담에서 시진핑 주석과 만나 “러시아는 현재 올해 양국 간 가장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 주석의 러시아 방문”이라며 “(시 주석의 러시아) 방문은 양국 관계에 있어서 큰 이벤트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물론 바로 뒤이어 7월7~8일엔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을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상견례적인 첫 만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과 그에 대한 은폐 의혹, 이를 조사하려는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쫓아냄으로써 특벌검사의 조사까지 받게 되는 상황에 내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과의 우정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인가? 1월초만 해도 미-러 간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7월로 예정된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러시아를 방문해 양자 정상회담을 하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트럼프의 러시아 방문은 외교일정에서 사라졌다. 이런 흐름으로 보건대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를 지렛대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외교가 가능할지가 의문이다.
2017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정상회의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미·중·러의 3자 정상외교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이 시기에 문재인 정부도 30일 밤(한국시각) 한-미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7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의 한-중, 한-러, 한-일 간 양자논의, 8월24일의 한-중 수교 25주년을 계기로 한 한-중 정상회담 등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4월 러시아 특사 방문에서 협의된 바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할 가능성이 큰 9월 블라디보스토크 3차 동방경제포럼에서의 한-러 정상회담 등 미·중·러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그동안 냉전 이후의 패권적 세계질서의 변화는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단독 패권에서 중국의 부상 내지 미-중(G2) 간의 대국관계로 변화해왔다면 이제 또 다른 G2가 부각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러시아가 전략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서 유럽과 아시아와는 달리 변방에 낙후돼 있던 터키, 이란, 인도,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유라시아의 중심지대가 가장 역동적인 경제협력의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관계 및 북방 유라시아 협력을 포함한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이러한 미·중·러 3자 전략 구도의 변화와 패권의 흐름에 대한 냉철한 판단 위에서 검토돼야 할 것이다.
강태호 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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