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휴양지 발리섬의 동북쪽 아궁산에서 화산재 분출 등 화산활동이 강화돼 현지 당국이 폭발 위험 단계를 최고 수준으로 지난 27일 격상했다. 이에 발리 동쪽의 롬복 국제공항에 이어 발리 응우라라이 국제공항(덴파사르 공항)도 잠정 폐쇄돼 6만명 가까운 관광객의 발이 묶인 상태다. 화산에서 100여㎞ 떨어진 발리 동쪽의 롬복엔 우리 국민 20여명이 관광 목적으로 체류 중이다. 휴가차 롬복을 찾은 정유경 <한겨레> 기자도 방송사 기자인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공항에 발이 묶여 있다. 28일 정 기자가 보내온 지난 72시간의 현장 소식을 전한다.
■ 26일 오전 10시: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화산이라니
“화산이 폭발해서 발리 공항이 문을 닫는다고요?”
티브이엔(tvN) 예능 프로그램인 <윤식당>으로 유명해진 길리섬의 한 리조트에서 26일 오전 10시 체크아웃을 하다가 아궁 화산 폭발 소식을 들었다. “지금 나가도 롬복에서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다른 한국인 가족들이 하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는 발리의 아궁 화산과 100㎞나 떨어진 롬복 공항을 통해 24일 왔기 때문이다. 섬들로 이뤄진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도 발리와 롬복은 이웃 섬이다. 롬복에 딸린 작은 섬 중 하나가, 바로 익히 알려진 윤식당의 촬영지인 길리 트라왕안 섬이다. 말이 이웃 섬이지, 100㎞면 서울에서 춘천 거리다. 하늘은 티 없이 푸르렀다.
■ 26일 낮 12시: 공항은 난리통
설마 하며 2시간여 배와 버스를 갈아탄 끝에 롬복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짐을 부치러 카운터로 들어가자, 오후 2시55분 자카르타로 향하는 가루다 항공 비행기가 ‘취소’됐다.
여행을 같이 간 다른 일행과 조를 나누었다. 수속 카운터에서 알려준 대로, 가루다 항공 사무실에 가서 가장 빠른 비행기 표로 바꾸는 줄에 합류했다. 다른 한 조는 혹시나 하고 바틱 에어 사무실 창구 앞에서 줄을 섰다. 만들어진 줄은 줄이라기보단 좀비들이 마구 달려드는 영화 <월드워Z>의 한 장면과 유사해 보였다. 3시간 만에 가루다 항공 직원과 대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한마디만 들었다. “여기서 표 교환 안 되니 수속 카운터로 가세요. 여긴 환불만 됩니다.” 같은 처지가 수두룩했다. 뒤에 선 외국인 일행은 수속 카운터에서 여기로 가라고 했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기나긴 핑퐁이었다.
바틱 에어는 26일 저녁 표가 있으나, 현금결제만 가능하며, 5시간 전에 취소해야 50%를 돌려주고 그 이후엔 환불 불가라고 했다. 결제하면 75만원은 무조건 날아간다. 고민하고 있는데, 오후 4시가 거의 다 돼 갑자기 사람들이 바틱 에어 사무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루다 항공이 그날 운행을 모두 접기로 했다고 한다. 이어 공항이 폐쇄된다는 이야기가 건너건너 전해졌다. 즉 바틱 에어의 비행기도 못 뜬다는 이야기였다. 이 모든 소식이 전광판 알림이나 방송 메시지 따위 없이 전부 이 난리통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58㎞ 거리의 발리 공항은 폐쇄되지 않았는데, 왜 아궁 화산에서 100여㎞ 떨어진 롬복 공항이 문을 닫는다는 것일까? 바람의 방향이 화산재를 동남동향으로 날리고 있어, 인도네시아 교통국은 오후쯤 화산재가 롬복 공항 상공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고 했다. 화산재가 비행기 엔진에 들어가면 최악의 경우 엔진이 멈춘다. 물론 이 소식도 <아에프페>(AFP) 등 외신을 통해 접한 것이다. 이때 그냥 차라리 배를 타고 (당시까지는 일부 운항이 되던) 발리로 가서 아무 비행기나 잡아타는 게 빨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곳은 ‘만약에’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이날 발리로 갔다가 다시 롬복으로 돌아온 스페인 사람을 만났는데, 거기도 다음날 공항이 닫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롬복에서 ‘비행기 로또’를 노리는 신세였다.
28일 새벽 6시에 공항 출국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줄을 선 사람들
■ 26일 오후 5시: 장기전 돌입
모두 지쳤다. 아이들은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롬복 공항의 먼지를 온몸으로 쓸었다. 두 곳뿐인 커피숍은 만석이었다. 일단 공항에서 800m 거리에 있다고 하는 호텔을 잡았다. 택시 기사는 바가지를 씌웠다. 호텔은 최신식 시설이라며 평점이 후한 곳이었다. 방문을 열자 도마뱀과 10여마리의 바퀴벌레가 반갑게 맞아줬다. 말문을 트고 처음 본 곤충이 여름 매미였던 두 돌 아들은 벌레를 볼 때마다 신이 나서 “매미~”라고 외쳤다.
■ 27일 아침 7시: 창밖 날씨는 좋은데…
비좁은 더블침대 하나에서 네 식구가 떨어질라 조마조마하게 잠들었다. 약오르게도 창밖 날씨는 좋았다. 비행기가 꼭 뜰 것 같았다. 자카르타 환승에 하루 이상 넉넉히 여유를 뒀기 때문에 한국에 제시간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공항에 전화하니 롬복 공항 폐쇄는 풀렸다고 했다. 이번엔 발리 공항이 폐쇄됐다. 저녁 비행기까진 시간이 넉넉해 편도 1시간 거리에 있는 마트도 다녀왔다. 어쩐지 이 체류가 길어질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기저귀와 아이들이 먹을 주스와 과자를 넉넉히 샀다.
■ 27일 정오: 애들은 누가 봅니까?
휴가 기간이 남았지만 우리 부부는 각자 회사에 넌지시 상황을 전했다. 여행 온 일행 중 한 명은 사교육 종사자였다. 수능이 일주일 미뤄지며 출국 전날까지 고3들을 봐주었는데, 귀국이 늦춰져 기말고사 준비를 봐줄 수 없을까봐 가장 애를 태웠다. 나머지도 의무 연차 소진을 핑계 삼아 눈치 보며 휴가를 내고 온 여행이었다.
남편도 방송사 기자인 우리 부부는 좀 더 다른 압박에 시달렸다. 방송국에서는 미안해하면서도 8시 뉴스 전에 공항 영상을 부탁했다. 방송국 디지털팀은 카드뉴스를 만들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신문사에서는 지면을 비워놓겠다고 했다. 둘 다 기사를 쓰면 애들은 누가 봅니까?
■ 27일 오후 4시: 예약은 또 취소
가루다 항공 취소 문자가 왔다. 일행 일부는 공항으로 뛰어갔다. 뭐든 표를 구하기 위해서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을 하더라도 결제가 안 되니 사무실로 현금을 들고 뛰어야 했다. 항공사는 카드도, 해외송금 이체도 받지 않았다. 온라인 결제가 되는 한국이 그리웠다. 가루다 항공 사무실에 다시 긴 줄을 서 수요일 비행기 표로 바꾸었다. 간혹 출발한다는 바틱 에어 표는 백방으로 뛰어도 구하지 못했다. 딱 하나 성과는 있었다. 남편은 공항에 간 김에 영상을 찍어 보내고 멘트도 따서 리포트를 내보냈다.
■ 28일 0시: ‘새로 고침’ 반복
공항 앞 호텔이 다양한 국적의 인원들로 북적거렸다. 일행 한명은 미친 듯한 ‘새로 고침’ 신공을 선보이며 밤새 바틱 에어 취소 표가 한두장씩 나올 때마다 예약을 걸었다. 예약하고 송금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예약이 취소되기 때문에 나오는 표가 있었다. 고마운 현지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찌어찌 한밤중 송금을 마치고 28일 저녁 비행기 세 편에 각각 흩어져 예약을 마쳤다.
■ 28일 새벽 4시: 뛰고 또 뛰고
일행 1명과 공항으로 뛰어갔다. 새벽 3시에 오전 11시30분발 바틱 에어 비행기 표 3장이 갑자기 등장했다. 1시간 내로 현금을 치르고 확정을 받아야 했다. 전날 사무소 직원은 자신들이 새벽 4시에 다시 출근한다고 했다. 새벽 4시의 공항엔 놀랍게도 사람들이 있었다. 6시 비행기를 타려는 이들 또는 예약을 확정하려는 이들이다. 그리고 직원들은 없었다.
28일 새벽 4시에 출국장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는 종이를 깔고 출국장 앞에 앉았다. 뒤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국제적인’ 하소연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중국,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호주, 미국…. 이탈리아 여성이 투덜댔다. “전광판을 봐, 아무 알림도 없어!”
새벽 5시 직원들이 들어갔다. 6시 출국장 입장이 허용됐다. 바틱 에어에 줄을 선 끝에 네 가족이 2석씩 나눠 그대로 저녁 비행기를 타게 됐다. 그동안 바틱 에어의 저녁 비행기는 오후 6시 이후 거의 취소됐다. 다시 로또 당첨을 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 28일 오전 10시: ‘낚시 의자’ 구매
‘낚시 의자’를 샀다. 아이를 안고 서서 기다리는 게 일이라 팔이 아팠다. 한국에 돌아가면 ‘뻗치기’(취재 대상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 할 때 쓰면 딱 맞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닌데…. 28일 오전 6시 롬복 공항은 운영을 재개했다고 뉴스는 보도했다. 8시 화산이 재분화했다고 했다. 발리 공항은 29일까지 폐쇄가 연장됐다. 당국에서는 발리에 발이 묶인 이들에게 롬복 등으로 배를 타고 이동해 비행기를 타라고 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롬복에서도 공항 문이 열렸다고 비행기가 뜨는 것은 아니다. 호텔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이 오전 9시30분 바틱 에어 수라바야행 말고는 오전에 다 결항됐다고 알려 왔다. 호텔은 일행의 객실 하나는 연장해줄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수라바야까지 배와 차량, 기차로 이동한 뒤 다시 비행기를 타는 코스를 고민했다. 최단시간을 상정해도 1박2일의 대장정이다. 두 돌, 다섯 살 아이들과는 무리였지만 심각하게 고민했다. 화산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는 게 나은 걸까. 100㎞ 떨어진 아궁 화산의 연기가 심지어 롬복에서도 보였다. 한 택시 기사가 말했다. “저기 연기 보여? 어제보다 더 커졌어. 1963년 아궁 화산이 터졌을 때 우리 할머니가 발리에서 롬복으로 피난을 왔어. 그때는 화산이 터지는 소리가 롬복까지 들렸대.” 그는 덧붙였다. “그때도 롬복은 안전했어. 발리 사람들이 다 롬복으로 피난 와서 그 뒤 여기도 힌두교 사원이 많이 생겼지. 화산재만 이쪽으로 날리지 않으면 돼.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다고 하니 아마 비행기도 뜰 거야.” 발리가 더 위험하다. 비행기가 몇편씩이라도 뜨는 우리는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 28일 오후 3시: 비행기가 뜬다
오후 2시15분 바틱 에어부터 비행기 운항을 재개한다는 낭보가 전파됐다. 남편은 오후 4시30분 큰아들과 비행기를 탔다. 나는 둘째 아들과 함께 저녁 비행기를 예약했다. 공항의 줄도 한결 질서를 찾았다. 롬복 공항 고립 3일째, 〈월드워Z〉의 세계도 룰이 잡히기 시작했다.
롬복/글·사진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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