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을 계기로 열린 한-러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지난 1월9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려서 남북대화를 ‘복원’하기로 한 이래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한정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등의 참석으로 평창올림픽은 이제 스포츠보다 본격적인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외교무대로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근데 거기에 러시아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9월7일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참석을 초청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2014년 소치올림픽 등) 동계올림픽을 연이어 주최하는 호스트 국가들로서 전세계에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보낼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문 대통령과 현지의 평창올림픽 홍보관을 함께 참관하는 등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대표팀이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을 축하한다. 러시아에서 뵙길 기대한다”고 넌지시 2018년 6월 모스크바 월드컵에 초청하겠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스포츠를 통한 정상외교의 바람은 ‘덕담’에 그치고 말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지난해 12월6일 러시아의 평창올림픽 참가 금지 결정을 내림으로써 푸틴 대통령은 오려고 해도 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 러시아 없는 평창올림픽 외교무대
결과적으로 올해 한반도 문제의 향방을 가름할 주요한 외교무대에서 러시아만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주석의 참석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중국, 미국은 애초에 정상이 올 가능성이 크지 않았기에 푸틴 대통령이 왔다면 그의 자리는 무대의 중앙이 됐을 것이다. 또 그는 평창에 오기로 결정한 아베 총리와도 돈독하고 특별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기에 그 빈자리가 더 커 보이기도 한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6일 아이오시의 러시아 출전 금지 결정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비난했지만, 푸틴의 방한을 ‘금지’했다는 점에서 그건 다른 의미에서 한반도에 ‘정치적인 의도’를 갖는 결정이 된 셈이다.
그가 동계올림픽에 보인 지원과 기대도 그의 불참을 아쉽게 한다. 우선 푸틴 대통령은 애초 우려했던 것과 달리 러시아의 출전 금지 결정에도 러시아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국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지난 1월31일 그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평창올림픽에 참가하는 러시아 선수들을 불러 특별히 격려했다. 러시아 국영 통신 <리아 노보스티>에 따르면 그는 “올림픽 출전 금지 제재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우리를 용서해 달라. 선수들을 보호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평창올림픽에 러시아 선수가 아니라 ‘러시아 출신 올림픽 선수’(OAR) 자격으로 출전한다. 30년 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하기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소련 선수들은 처음 자신을 맞은 남한 국민들로부터 예기치 못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미 언론들은 미국과 소련 간의 경기에서 수십년 동안 우방으로 지내온 한국 국민들이 소련팀을 일방적으로 응원한 것에 미 관리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2017년 9월 블라디보스톡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출처:외교부 트위터 자료
알렉산드르 티모닌 주한 러시아 대사를 인터뷰하고자 한 것은 그런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다. 러시아가 출전을 포기하지 않은 데 대한 고마움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평창이 러시아 선수들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관심거리다. 그보다는 한반도 외교무대에서 러시아를 탈락시켜서는 안 될 이유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 어떤 정부보다도 북방협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북핵을 넘어 북한 문제라는 큰 그림을 풀어가는 데 러시아와의 북방협력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오는 3월, 결과가 너무 뻔하기에 큰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러시아는 대선을 앞두고 있고, 5월엔 새로운 4기 푸틴 정부가 출범하게 될 것이다. 올해 수교 70돌을 맞이하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특별한 관심을 요한다. 2월초 북한 외무성 대표단은 러시아를 방문해 양국 외교 현안과 함께 수교 70돌 기념 공동 행사를 주요 의제로 다룬 것으로 전해진다.
■ ‘남북러 3자 협력은 지정학적 변화를 초래할 것’
알렉산드르 티모닌 주한 러시아 대사.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티모닌 대사에게는 먼저 한반도 평화 로드맵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일관되게, 그리고 지난해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엔 매우 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북핵 해결을 위한 로드맵을 제시해왔다. 그 1단계이자 첫 단추가 북한이 추가적인 핵·탄도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하고 핵과 미사일의 비확산을 공약하면 한·미 양국도 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2단계를 거쳐 다자협정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지역 안보체제 등을 논의하는 3단계의 단계별 구상을 담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부분적이나마 1단계의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로드맵 준비 자체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이 중요하게 기여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로드맵이 고정적인 틀에 갇힌 교리(도그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한반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당사자들에게 구체적인 논의를 촉구하는 ‘초대’로 봐야 한다. 우리 로드맵의 이행은 현재 이 제안을 검토하는 모든 당사자들이 동의해야 가능할 것이다. 남북 접촉 및 북한의 올림픽 참가가 핵미사일 실험과 대규모 한-미 군사연습의 중지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인터뷰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러시아가 1월9일 판문점 남북고위급회담 등 남북관계의 긍정적 진전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러시아는 그 일에 전력을 다해 도움을 줄 의향이 있다.” 그 절실함은 아마도 러시아가 추진해온 남한, 북한의 3자 경제협력 프로젝트가 남북의 진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티모닌 대사는 나진-하산 남북러 3자 프로젝트 틀 내에서 협력을 재개하는 것 이외에도 세 나라가 협력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많다면서 러시아의 전력을 북한의 영토를 통하여 남한에 수출하는 사업을 특별히 강조했다. 물론 그 역시 이들 사업은 ‘어렵고 규모가 크고 많은 정치적·기술적 요소들이 충족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들 사업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을 넘어선 ‘지정학적인 변화’다.
“러시아, 남한, 북한이 참여하는 3자 협력사업의 이행은 한반도 문제들을 해결하는 넓은 기회를 줄 수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및 한반도종단철도의 연결, 러시아와 남북한 간의 송전선과 가스관 건설 등은 역내 지정학적인 상황을 본격적으로 변화시키며 한반도 핵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 근대 지식인들의 ‘정신적 유토피아’로서의 러시아 문화
알렉산드르 티모닌 주한 러시아 대사가 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주한러시아대사관에서 열린 ‘외교관의 날’(Diplomatic Service Day) 행사에서 송영길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오른쪽) 등과 인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국내의 한 러시아 전문가는 러시아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길목마다 어떤 ‘유토피아’처럼 자리를 잡고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광수를 비롯한 근대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으며, 카추샤와 나타샤, 소냐는 순이만큼 친숙한 이름이었고, 시베리아는 향수의 대상이요 실제로 이들이 방랑한 무대였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수준 높은 문학, 미술, 음악 등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임에도 한-러 간의 교류나 관심은 많이 미흡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가 2017년 러시아여론조사센터(프치옴)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양국민들의 상호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무관심층의 비율이 한국 국민 46%, 러시아 국민 58%로 절반을 넘나든다.
티모닌 대사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삼국사기> 등을 읽은 ‘코리아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임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 문화가 한국 지식인들의 정신적 생활에 오랫동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데 동의한다면서 “두 나라의 문화인이나 지식인들이 러시아 역사, 문화, 음악, 미술에 대하여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기에 그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그에 따르면 2014년 1월 발효된 비자면제협정 이래로 한-러 상호방문객이 15% 이상씩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또한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선 러시아어는 벌써 많은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채택했으며 이는 지방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주요 대학에 러시아어과가 있으며 학생이 2천명 이상 된다. 또 300명 정도의 러시아 학생들이 한국에 유학하고 있다. 러시아 교육과학부의 승인을 받은 서울과 대구의 러시아어 시험 센터에는 매년 러시아 유학을 희망하는 500명 정도의 학생이 러시아어 능력 시험에 응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3년간 대사를 지내면서 한-러 관계에서 가장 ‘아쉬웠던 일’과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을 물었다. 2013년 11월 푸틴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맞춰 박근혜 정부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내걸고 러시아, 북한과의 북방협력을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결과는 실망만 안겨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련한 외교관답게 아쉬웠던 부분은 빼놓고 말했다.
“대사로 오기 전에도 10년 이상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큼 많이 익숙했다. 그래도 2016~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반대 시위의 규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몇달 동안 계속된, 수백만명이 참여한 시위는 한국 국민들의 시민으로서의 높은 책임의식을 보여주었으며, 법치, 민주주의,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일치된 모습과 단결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조금 의외다. 다음달 대선을 거치면 네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되는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 대사이자, 누구보다도 한국을 잘 아는 베테랑 외교관인 그에게도 정녕 촛불시위는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강태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kankan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