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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노무현·임수경·소떼까지…‘금단의 선’ 넘어 평화의 길 튼 주역들

등록 2018-04-26 16:08수정 2018-04-27 08:55

[남북정상회담 D-1] 군사분계선 위에 역사를 쓴 사람들

1948년 평양 정당회의 가던 백범
참석차 38선 넘으며 비장한 다짐

1989년 비밀방북 대학생 임수경
유엔사 불허에 무릎기도뒤 남하

판문점 통한 첫 민간방북 정주영
소떼 몰고 2차례 꿈 같은 고향행

분단뒤 도보방북 첫 대통령 노무현
감격 속 “금단의 선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은 인물들
“여기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는 거죠?”

판문점 콘크리트 바닥에 그려진 노란 선을 5m쯤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이 갑자기 돌아섰다. 벤츠S600 전용차에서 내려 20여m 북쪽을 향해 걷던 참이었다. 카메라가 연신 터지고, 마이크가 한껏 들려졌다.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은 장벽이었습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그러고선 다시 돌아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노란 선 앞에서 감격에 겨운 듯 잠시 숨을 골랐다. 오른발로 노란 선을 밟더니 왼발을 성큼 내디뎠다. 2007년 10월2일 오전 9시6분. 남쪽 대통령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걸어서 북쪽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 장벽’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다.

한반도 허리 자른 판문점 노란선
정전협정 따라 그어진 군사분계선
한강~고성 200m 간격 표지판 250km

노란 선은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려 일부러 그은 것이었다.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북한군이 맺은 정전협정에 따라 그어진 군사분계선은 한강 어귀 교동도에서 동해안 고성 명호리까지 250㎞에 이르지만, 실제론 눈에 보이지 않는다. 200m 간격으로 설치된 표지판이 선의 존재를 알릴 뿐이다. 그런 유령의 선이 한반도의 허리를 잘랐다. 사람들이 무시로 오가던 길을 끊었다.

2007년 10월2일 군사분계선을 넘는 노무현 대통령 부부.
2007년 10월2일 군사분계선을 넘는 노무현 대통령 부부.
군사분계선은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상징한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진 이후 전쟁과 휴전, 군사적 대치로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한다. 지금도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2㎞ 밑으로 설정된 ‘비무장지대’ 주변에는 세계에서 가장 삼엄한 ‘무장지대’가 펼쳐지고 있다.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은 이런 분단의 아픔을 씻어내려는 노력과 닿곤 했다. 그것은 은밀하지 않으면, 위험하거나, 혹은 위대한 일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그 선을 넘었다. 통일정부 수립을 갈구하던 김구 선생은 1948년 4월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38선을 건넜다. 그 순간 비장한 기분이 들었는지, 38선 나무 푯말 앞에서 아들, 비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빛바랜 흑백으로 남은 그날의 사진을 보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김구 선생 뒤로 ‘WARNING’(경고)이란 문구가 쓰인 푯말이 보인다. 주변은 황량하다.

김구 선생은 자신의 방북이 분단의 선을 없애고 통일의 길을 열기를 꿈꿨다. <백범어록>에는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선생의 소망과는 달리 38선은 사라지지 않고, 전쟁과 정전협상을 거쳐 군사분계선으로 이어졌다.

1948년 4월19일 평양 가는 길에 38선 표지판 아래 선 김구 선생.
1948년 4월19일 평양 가는 길에 38선 표지판 아래 선 김구 선생.
남북대치 상황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다. 남북의 정치적 합의와 유엔사의 승인이 있어야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은밀히 밀사들이 오가기도 했지만, 세상은 훨씬 나중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남북대화가 오갈 때만 잠시 길이 열렸다. 협상대표단과 수행기자단, 고향방문단, 예술단이 그렇게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그러다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다시 막혔다. 그럴 땐 선을 넘는다는 생각 자체가 불온한 일이었다.

1989년 8월15일 한 대학생이 북에서 남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내려왔다. 학생운동 조직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독일을 거쳐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한 임수경이었다. 붉은색 반팔 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은 그는, 동행한 문규현 신부의 손을 꼭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임수경은 평양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리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분단 이후 남쪽의 학생 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외국의 평화운동가 300여명과 함께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행진했으나, 유엔사는 그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분계선 북쪽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였다.

그의 군사분계선 통과는 남쪽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그해 3월 문익환 목사가 베이징을 거쳐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통일 방안을 협의하면서 파문을 일으킨 상황과 맞물렸다. 문 목사는 방북해 통일의 꿈을 펼쳤으나, 군사분계선을 넘지는 못했다. 그는 방북 전에 남긴 시에서 걸어서 평양까지 가기를 열망했다. 그는 그 소망을잠꼬대 아닌 잠꼬대’라고 표현했다.

1989년 8월15일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임수경.
1989년 8월15일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임수경.
그들이 기도했던 ‘평화의 도구’를 9년 뒤 소 떼가 맡았다. 1998년 6월16일 500마리의 소 떼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충남 서산농장에서 키운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한 것이다. 50대의 트럭 행렬은 15분 만에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 차원의 합의를 통해 판문점을 거쳐서 민간인의 방북이 이뤄진 것은 처음이었다. 소 떼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던 날, 정 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감문을 읽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때 그 소 1마리가 500마리의 소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정 회장은 넉달 뒤 이번엔 501마리의 소 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정 회장은 1차 방북 때 8일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북쪽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 등에 합의한다. 그에 따라 2차 방북 직후 금강산 관광이 시작돼 그해 11월18일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한다. 이후 2000년 6월엔 분단 이후 최초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김 대통령은 하늘길로 평양을 방문했다. 소 떼가 땅과 바다, 하늘로 ‘평화의 길’을 연 것이다.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한다. 군사분계선은 활짝 길을 열었다. 2007년 5월엔 경의선과 동해선 열차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시험운항했다.

1998년 6월 소떼 방북에 나선 정주영 회장.
1998년 6월 소떼 방북에 나선 정주영 회장.
소 떼가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은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인 <시엔엔>(CNN)을 통해 생중계됐다. 외신들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국가인 남북한이 최초로 휴전선을 열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 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엔 ‘황소 외교’가 있다”고 평가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까지 평했다.

그러나 길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았다. 군사분계선은 평화의 길에서 다시 냉전의 철문으로 바뀌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고, 개성공단은 폐쇄됐다. 평화의 길에 일시적 후퇴는 있을 수 있지만 다시금 냉전시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무너졌다. 평창 겨울올림픽 전까지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마저 감돌았다. 그러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며 다시 평화의 길을 예고하고 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책 <냉전의 추억>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은 사람들의 얘기를 전한다. 남북대화의 역사는 비밀대화의 역사였다면서도 시민사회 인사들의 불법 방북사에 주목한다. “엄혹한 시절에 선을 넘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 옆에도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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