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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넘어가볼까요”

등록 2018-04-27 22:47수정 2018-04-27 23:10

판문점 12시간 ‘평화의 드라마’

"김 위원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하면서 남측으로 오시는데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질문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라고 답했다. 두 사람이 5센티미터 높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가 되돌아오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김 위원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하면서 남측으로 오시는데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질문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라고 답했다. 두 사람이 5센티미터 높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가 되돌아오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저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

27일 오전 9시30분. 막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농담처럼 부러움을 표시하자, 김 위원장이 기다렸다는 듯 선뜻 화답했다. 김 위원장은 웃으며 문 대통령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정상은 손을 잡고 가볍게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북쪽에서 10초가량 머물며 대화를 나누다 다시 남쪽으로 건너왔다. 판문점에서 이날 하루 종일 펼쳐진 ‘평화 드라마’를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이날 두 정상의 만남은 내내 막힘이 없었다. 김 위원장을 맞는 문 대통령은 정중하면서도 따뜻했다. 꾸밈없이 반가움을 전하고 관심사를 꺼냈다. 김 위원장은 활달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문 대통령에게 화답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걸걸한 목소리로 진솔하게 말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솔직함이라는 ‘공통의 화법’을 구사하는 듯했다,

김 위원장의 활달함은 첫 등장부터 예고됐다. 김 위원장은 9시27분께 북쪽 판문각을 나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군사분계선 앞에서 기다리던 문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정말 마음 설렘이 그치지 않는다. 이 역사적 장소에서 만나니까, 대통령께서 이렇게 분계선까지 나와서 맞이해주시니 정말 감동스럽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온 건 위원장님의 아주 큰 용단이었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아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은 극적이었다. 문 대통령이 왼손으로 군사분계선 남쪽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오실까요?”라고 권하자 주저하지 않고 왼발을 내밀어 훌쩍 넘어왔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남쪽 땅을 밟기는 분단 이후 처음이다.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도,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못했던 일이다. 김 위원장은 돌아서 북녘을 향했다. 잠시 감회에 빠진 듯했다. 김 위원장은 다시 돌아서 문 대통령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정상은 전통 의장대가 도열한 가운데 ‘자유의 집’ 우회도로를 걸어 사열 장소를 지났다. 빨간 양탄자로 표시된 길을 걸으면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외국 사람들도 우리 전통의장대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 보여드린 전통의장대는 약식이라 아쉽다. 청와대에 오시면 훨씬 좋은 장면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말하자, 김 위원장은 “아, 그런가요. 대통령께서 초청해주시면 언제라도 청와대에 가겠다”고 답했다.

의장대 사열은 진지했다. 문 대통령은 중간중간 거수경례를 했고, 김 위원장은 좌우를 응시했다. 사열 중에는 사성곡과 봉황곡이 울려퍼졌다. 두 정상은 사열을 마치고선 수행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김 위원장이 “오늘 이 자리에 왔다가 사열 뒤 돌아가야 하는 분들이 있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이 “그럼 가기 전에 수행원 모두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기념촬영을 제안했다. 역시 예정에 없던 행사였다.

9시41분. 두 정상이 회담장인 평화의 집에 들어섰다. 김 위원장은 전통 해주소반을 본뜬 서명대 의자에 앉아 동생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건네준 펜으로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 김정은 2018.4.27”이라고 썼다.

이어 두 정상은 1층 로비에 걸린 ‘북한산’ 그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뒤 두 정상은 그림을 바라보며 30초가량 대화를 나눴다. 문 대통령은 ‘장백폭포’ 그림을 소개하면서 백두산을 가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전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나는 백두산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가는 분들이 많더라. 나는 북측을 통해 꼭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 머리발언은 감동과 유머가 교차했다. 김 위원장은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보니까 사람이 넘기 힘든 높이로 막힌 것도 아니고, 너무나 쉽게 넘어온 역사적인 이 자리까지 11년이 넘었는데, 왜 그렇게 오기 힘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렵사리 평양냉면을 가지고 왔는데, 이게 멀리서, 멀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두 정상은 정상회담을 마친 뒤 헤어졌다. 김 위원장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량을 타고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넘어갔다. 김 위원장으로선 네번째 군사분계선 통과였다. 두 정상은 오후 4시27분 기념식수를 하기 위해 다시 만났다. 기념식수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트럭에 태워 방북할 때 지났던 ‘소떼길’ 옆에서 이뤄졌다. 김 위원장은 차량을 타고 남쪽으로 넘어와 문 대통령과 다시 만났다. 이날 다섯번째 군사분계선 통과였다.

두 정상은 미리 심어져 있는 1953년생 소나무 앞에 서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소나무 앞에는 한라산 흙과 백두산 흙, 한강 물과 대동강 물이 놓여 있었다. 두 정상은 흰 장갑을 끼고 각자 삽을 잡았다. 문 대통령은 백두산 흙을, 김 위원장은 한라산 흙을 삽에 퍼서 나무에 세차례 뿌렸다. 문 대통령은 평양 대동강 물을, 김 위원장은 서울 한강 물을 나무에 뿌렸다. ‘합토합수’(合土合水)를 통해 남북 평화와 화합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기념식수 표지석에는 ‘평화와 번영을 심다’는 글귀와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서명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두 정상은 공동식수 뒤 판문점 안에 있는 도보다리에서 산책을 했다. 4시36분부터 이뤄진 두 정상의 산책은 이번 회담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였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도보다리 쪽으로 나란히 걸으며 담소를 주고받았다. 손짓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두 정상은 군사분계선 표지물 왼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약 40분가량 배석자 없이 얘기를 나눴다. 자리에 앉자 김 위원장은 근접 촬영을 위해 따라붙은 북쪽 기자들에게 ‘잠시 비켜달라’는 듯 손짓을 해 주변을 물리쳤다. 탁자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은 두 정상의 간격은 1m도 채 되지 않았다. 전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외교사에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공개밀담’이 펼쳐진 것이다.

두 정상의 평화 드라마는 5시40분께 판문점 선언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문 대통령은 평화의 집 앞마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대담하게 오늘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통 큰 합의에 동의한 김 위원장의 용기와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고 김 위원장을 치켜세웠다. 이어 연단에 오른 김 위원장은 “하나의 핏줄과 역사, 문화와 언어를 가진 북남은 본래처럼 하나가 돼 끝없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며 “북남의 전체 인민과 세계가 보는 가운데 서명한 합의가 역대 합의처럼 시작만 뗀 불미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두 사람이 무릎을 마주하고 소통·협력해 반드시 좋은 결실이 맺어지게 노력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두 정상은 이어 부부 동반으로 만났다.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는 6시16분께 검은색 벤츠를 타고 평화의 집 앞에 도착한 리설주 여사를 맞았다. 남북 정상의 부부 동반 회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리 여사에게 “매우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고, 리 여사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다”고 화답했다. 리 여사는 “오전에 남편이 회담을 갔다 와서 문 대통령님과 함께 좋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회담도 잘 됐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 부부와 김 위원장 부부는 기념촬영을 한 뒤 3층 연회장에서 열린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장에는 해금과 옥류금의 합주로 남쪽에도 익숙한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가 울려퍼졌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영상] 2018 남북정상회담 주요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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