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과정을 잘게 쪼개지 않을 것이다.”(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불충분한 합의는 수용할 수 없다.”(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안보 핵심들이 일제히 ‘북한의 대가 없는 광범위한 비핵화’를 강조하고 나섰다. 폼페이오 장관은 8일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볼턴 보좌관은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핵협정 탈퇴 선언 직후 백악관에서 북한을 겨냥했다. 모두가 전날 북한이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재확인한 ‘단계별, 동시적 조처’를 일축하는 발언들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우리는 과거 걸었던 길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제재를 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전에는 단계별 조처에 보상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의 평양행이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를 최종적으로 조율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에 비춰보면, 미국의 태도가 여전히 완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폼페이오 장관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거듭 강조했다. 볼턴 보좌관은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가 북한을 향한 메시지를 품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오늘 탈퇴는 다가오는 북한과의 회담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불충분한 합의는 수용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이란 핵협정의 문제점으로 지목하는 요소를 북한과의 협상에선 제거하겠다는 것을 시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란 핵협정을 ‘최악의 계약’으로 비난했다. 특히 이란의 핵능력 제한을 10~15년으로 한정한 ‘일몰규정'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미국은 이란 핵협정의 문제로 △탄도미사일 관련 내용이 담기지 않았고 △핵 프로그램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하며 △군사기지 사찰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미국은 북한의 핵폐기 대상에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핵물질까지 포함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볼턴 보좌관은 특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북한이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돌아가 핵연료 주기의 시작과 끝 양쪽 모두를 제거하는 것, 즉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은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을 하지 않으며, 핵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볼턴 보좌관은 앞서 “모든 핵무기, 탄도 미사일, 생화학무기와 관련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북한 대량살상무기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폐기”를 요구한 바 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인정한다. 볼턴 보좌관이 이를 수용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미국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낳은 6자회담에서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반발에 부닥쳐 물러선 바 있다. 미국으로선 충분하지 않은 합의였다고 여길 수 있다.
미국이 이처럼 ‘과거 걸었던 길’을 ‘불충분한 합의’로 보고 있다는 점은 북한과의 협상을 이전과 다른 출발선에 세우려는 의지로 보인다. 과거의 합의를 실패로 보고, 북한과 새로운 합의를 맺겠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매우 유념하고 있다. 이것은 새롭고 과감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그보다 덜한 어떤 것도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으로선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미국의 요구에 직면한 셈이다. 유강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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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신뢰 구축해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40일 만에 전격적으로 다시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다롄 회담’ 결과와 관련한 북한 <조선중앙통신>(중통) 8일 밤 보도엔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조선반도 주변 정세 추이를 분석·평가하고 △전략적 기회를 틀어쥐고 △조(북)-중 사이 전술적 협동을 강화하기 위한 방도적인 문제들을 말했다는 것이다. “전략적 기회를 틀어쥐고”는 김 위원장이 어떻게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방도적 문제들”이란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담판에 앞서 구체적인 협상 및 정세 관리 방안을 시 주석과 상의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중국 외교부 겅솽 대변인은 9일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은 “북한 쪽이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
<중통>은 김 위원장이 밝힌 ‘방도적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뭔지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회담 결과 보도를 보면 ‘김정은식 해법’의 얼개가 드러나 있다.
우선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은 조선의 시종 하나같은 명확한 입장”이라고 재확인했다. 3월말 북-중 정상회담, 4·27 남북정상회담 판문점선언의 ‘완전한 비핵화’와 ‘핵 없는 한반도’ 다짐의 재확인이다.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이어 김 위원장은 “관련국들이 조선에 대한 적대시 정책과 안보 위협을 없애기만 한다면, 조선은 핵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비핵화는 실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완전한 비핵화’는 미국의 체제안전보장(적대정책과 안보위협 해소)과 등가 교환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북한의 완전한 핵폐기 이전에 보상은 없다’는 미국 강경파를 향한 메시지다.
이어 김 위원장은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구상을 밝혔다. “조-미 대화가 만드는 상호신뢰를 통해 관련 각국은 책임있게 단계적·동시적 조처를 취하여, 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전면 추진하고, 최종적으로 반도 비핵화와 지속적 평화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 우선 ‘대화를 통한 상호신뢰’를 북-미 모두 지금껏 가보지 않은 여정의 안내등으로 제시했다. 앞서 취한 △핵·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지 △북부(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외부 공개 △임박한 미국 억류자 석방 등이 ‘상호신뢰’를 쌓으려는 북쪽의 선의임을 에둘러 강조한 셈이다. 그러니 미국 쪽도 ‘믿을 수 없다’만 앵무새처럼 되뇌지 말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단계적, 동시적 조처”는 김 위원장이 3월말 북-중 정상회담 때부터 밝혀온 북-미 현안 해소의 방법론이다. ‘등가물의 동시 교환’ 방식이다. 이를 두고 ‘북한이 조금 내놓고 많이 얻으려는 살라미 썰기식 시간 지연 전술을 쓴다’는 비판이 있지만, 전혀 다른 해석도 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 위원장도 비핵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진행하고 싶어 한다”고,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빠른 비핵화를 원한다면 상응조처의 속도를 높이라는 뜻”이라고 짚었다.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은 “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전면 추진”하자며, 북쪽의 비핵화 조처와 미국 쪽의 관계 정상화 조처를 맞물리자는 제안을 내놨다. 김연철 원장은 “관계의 성격이 바뀌면 핵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된다는 뜻”이라며 “중요한 것은 관계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라고 짚었다.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가 6자회담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는 풀이도 있다.
김지은 이제훈 기자
mir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