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 북한식당 탈북자 송환 요구
판문점 선언 이산가족 상봉 연계
북-미 정상회담 앞두고 한국에 불만 표출
남쪽도 상응조처 요구하는 셈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가 19일(현지시간)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 폭파 장면 관측을 위한 전망대 설치 등 폐기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왼쪽은 지난 7일 촬영된 풍계리 핵실험장 일대 위성사진으로 북쪽과 서쪽, 남쪽 갱도 주변에 있던 이동식 건물들이 철거된 모습이 포착됐다. 오른쪽은 지난 15일 촬영된 위성사진으로 서쪽 갱도 인근 언덕에 4줄에 걸쳐 목재 더미가 쌓여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디지털글로브 38노스/연합뉴스 (*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북한이 한-미 연합 군사훈련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강연을 거론하며 남북 고위급회담을 연기한 데 이어 중국의 북한식당에서 일하다 집단탈출한 종업원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북한은 앞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통해 “남쪽 정권과 다시 마주 앉는 일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북한이 한-미,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를 향해 전방위 공세를 펴는 모양새다.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대변인은 19일 <조선중앙통신>과의 문답을 통해 2016년 4월 중국의 류경식당에서 일하다 집단탈출한 종업원들의 송환을 촉구했다. 대변인은 “우리는 반공화국 대결 모략 날조극이며 극악한 반인륜적 범죄행위인 괴뢰보수패당의 집단유인 납치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판문점 선언에 반영된 북남 사이의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 전망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데 대해 남조선 당국에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북한이 종업원들의 송환을 판문점 선언과 연계시킨 점이 주목된다. 이 문제가 8·15를 맞아 진행하기로 한 이산가족 상봉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남북은 판문점 선언에서 “민족분단으로 발생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남북 적십자회담을 개최하여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비롯한 제반 문제들을 협의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북한이 종업원들의 송환을 이산가족 상봉의 선행조처로 못박을 경우 남북관계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종업원 송환 요구는 문재인 정부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미 한국 국민이 된 종업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크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종업원들은 자유의사로 한국에 와서 정착해 지내고 있기 때문에 돌려보낸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남북이 원칙적 입장을 유지하면 당연히 이산가족 상봉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며 “남북이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야 판문점 선언을 이행하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의 최근 대남공세는 전방위적이다. 북한의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20일 일부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비난했다. 북한은 23~25일로 예고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시험장 폐기 현장 취재에 나설 남쪽 기자단 명단을 접수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비핵화 방법론을 놓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쪽이 류경식당 탈북 종업원 송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북-미 협상에서) 체제안전 보장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이 나오지 않자 그동안 협상 테이블에서 제쳐뒀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은 비핵화에 관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조처들을 취하고 있는데, 체제안전 보장 문제에 대해선 구체적인 약속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한 가닥이 잡히면 다른 부분도 함께 풀릴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 이상기류가 생기면서 22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문 대통령은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20분간 통화했다. “두 정상은 최근 북한이 보이고 있는 여러가지 반응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전했다. 북한이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이유로 남북 고위급회담을 갑자기 연기한 배경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남쪽에 날을 세우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으로 북핵 문제를 풀려는 문 대통령의 구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북-미 관계보다 남북관계가 훨씬 꼬여 있다”며 “실무적으로 풀 상황이 아닌 만큼 정상 간 핫라인을 가동하거나 물밑접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남쪽이 북-미 사이에서 방패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북한은 미국의 태도 변화를 보면서 남쪽의 변화도 확인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노지원 성연철 기자 moon@hani.co.kr [관련 영상] 한겨레TV | 이구동성 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