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해리스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2일 서울 중구 정동 미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에서 기자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제공
“평화협정을 맺기 전 어느 시점에 종전선언이 있을 것이다. 다만, 북한이 비핵화를 향해 상당한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해리 해리스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지난달 7일 부임한 뒤 처음으로 서울 중구 정동 대사관저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어 북한과의 종전선언 채택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해리스 대사는 종전선언을 채택하기 위해 북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여줘야 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북한의 핵 시설 목록 제출을 꼽았다. 해리스 대사는 “북한이 스스로 했다고 하는 일을 우리가 검증해야 한다”며 “북한이 신뢰구축의 길로 갈 수 있는 핵심이자, 본질적인 조치는 완전한 핵 시설 목록을 제공하는 일이고, 이는 아주 좋은 출발이 되겠지만 (미국은 목록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추구하는 것은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Finally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하고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을 폐쇄에 착수했다고 알려졌지만, 외부 전문가 등이 현장에 직접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검증되지는 않았다는 지적이다.
해리스 대사는 종전선언의 성격이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신중히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도 강조했다. 그는 이날 간담회에서 “우리가 (종전선언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조치를 취했는데 (북-미가) 협상에 실패하면 북한이 혜택을 본다. (한 번) 선언을 하면 후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체결 등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한국과 미국이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종전선언과 관련한 진전은 한국, 곧 동맹 사이에서 결정이 돼야 한다. 일방적이거나 빨리 가선 안 된다. 다만 얼마나 빨리 진행될 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중국의 종전선언 참여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묻는 말에 해리스 대사는 “언급하지 않겠다”면서도 “중국이 유엔 제재를 지지하는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또 우리와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다. 중국은 우리의 파트너 나라다”라고 답했다. 남-북-미-중 4자의 종전선언에 대해 반대도 찬성도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셈이다.
해리 해리스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2일 서울 중구 정동 미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에서 간담회를 마친 뒤 관저에서 함께 지내는 고양이 세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소개하고 있다. 노지원 기자
한편, 이날 해리스 대사는 지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뒤 북-미 사이의 비핵화 협상이 더디게 진행된다는 지적을 반박하며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가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7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속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해리스 대사는 “6월12일 이전에는 비핵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북-미 관계가) 아주 다른 위치에 있었다”며 “물론 전쟁 임박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이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평화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 회담이 있기 전과 현재 위치를 비교하면 (북-미 협상 등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현재 상황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남-북-미 등) 당사국이 여러 다른 차원의 레벨에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간담회에서 해리스 대사는 남북이 이산가족상봉을 위해 관련 시설을 개·보수하거나, 군사 핫라인 등을 설치하는 데 대한 지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남북 간 협력에 대해 “남북이 서로 의미있는 혜택을 주고, 긴장을 줄일 수 있는 조치다”라고 말했다. 다만,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남북 경제 협력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묻는 말에는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 대화가 함께 연계돼서 나아가기를 바란다”며 “한국과 미국이 모든 부분에 있어서 일치된 입장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산가족상봉과 같은 인도주의적 협력과 달리 남북 사이 경제 협력은 아직 이르다고 보는 것이다.
해리 해리스 신임 주한 미국대사가 2일 서울 중구 정동 미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에서 기자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제공
해리스 대사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비핵화를 진전시키느냐에 따라 현재 일시적으로 중단된 한-미 합동군사훈련 재개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해리스 대사는 “평화는 약간의 리스크(위험)을 취할 가치가 있다”며 “당분간의 군사훈련 중단을 지지한다. 다만 ‘당분간’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른다. 아직은 (결정하기) 이른 상태다”라고 말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달 27일 북한이 한국전쟁 미군 전사자 추정 유해 55구를 돌려준 데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한) 약속을 이행해줘서 고맙다. 좋은 출발이고, 긍정적인 제스처다”라며 “궁극적으로는 남-북-미가 함께 공동으로 유해를 발굴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이 유해송환이라는 북-미 사이 합의를 이행한 데 따라 미국이 관계정상화나 경제제재 완화 등 보상을 할 지 여부에 대해서는 “인도주의적인 제스처이자 모든 국가가 할 용의가 있는 유해송환과 비핵화를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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